“충무공 자살설 근거 없고 적군 탄환 맞고 사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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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명 해사 해양연구소 교수 논문
“당시 장수급 인물 10여명도 전사… 전사 시각은 아침 동틀무렵 추정”

‘충무공의 자살설은 근거가 미약하다. 아침 동틀 무렵, 관음포 입구에서, 일본군이 쏜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고 사망했다.’

이순신 연구가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제장명 교수는 ‘노량해전과 이순신 전사 상황 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이순신이 사망한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는 19일 충남 아산시 온양관광호텔에서 열리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주최 이순신 학술 세미나에서 이 논문을 발표한다.

이순신의 전사 경위와 시점, 장소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견해들이 있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주목을 받는다. 제 교수는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초기 등에 비해 기록이 부족한 데다 역사를 서술한 사람들도 자의적으로 문헌을 인용하다 보니 논란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논문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동안에도 꾸준히 제기돼온 ‘이순신의 자살설’이다. 논문에 따르면 이순신의 자살설은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가 ‘김충장공유사’란 의병장 김덕령 전기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대목에 주로 근거한다. ‘(무고한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고 또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제 교수는 “이민서를 비롯한 세간의 자살설은 (선조와 갈등을 빚던) 이순신의 당시 심정을 이해하려는 배려심에서 나온 문학적 표현으로 생각된다”며 “사료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순신이 숨을 거두자 휘하 군관인 송희립이 이순신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착용한 후 전투를 독려했다’는 ‘은봉전서’와 ‘노량기사’ 등 보다 신뢰할 만한 사료에 주목했다. 제 교수는 “당시 전투에서 이순신뿐 아니라 10여 명의 장수급 인물들이 전사했다”며 자살설을 일축했다.

제 교수는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대 속에서 부하들을 지휘했지만 위치를 가늠한 일본군 저격수들이 집중 사격을 퍼부었고 송희립이 먼저 총탄을 맞자 이 보고를 받고 놀라 굽혔던 몸을 펴던 중 왼쪽 가슴을 피격당한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 장수의 갑옷을 관통할 수 있는 살상력이 높은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제 교수는 “다른 주장들이 있지만 이순신의 전사 시각은 아침 동틀 무렵 전후로 추정할 수 있고 전사 지점은 관음포 입구 부근으로 추정된다”며 “이순신이 전사한 후 사후처리와 전투 지휘는 기함에 타고 있던 군관 송희립이 주도했고 이 과정에서 명군과의 협조관계는 손문욱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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