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닫은 국민… 투자 웅크린 기업… 수출까지 ‘빨간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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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트리플 슬럼프’]

《 #1. 맞벌이로 월 600만 원을 버는 송모 씨(38·경기 용인시) 부부는 각자 가입한 보험, 연금보험, 적금 등으로 월 200만 원을 지출한다. 두 딸(5세, 3세) 명의로도 보험과 적금을 50만 원씩 들고 있다. 소득의 절반이 자동으로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셈이다. 송 씨는 “부모님 용돈과 교육비까지 제하면 남는 게 거의 없어 아내가 화장품이나 옷을 사는 데 쓰는 돈은 한 달에 10만 원도 안 된다”고 말했다.

#2. 자동차엔진 및 냉장고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B사는 2011년 486억 원이었던 매출액이 지난해 327억 원으로 32.7%나 줄어들었다. 더 큰 걱정은 ‘노사정 대타협’ 무산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진 대기업들이 혹여나 해외 생산량만 늘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회사 서모 대표는 “국내 생산량이 줄어들면 납품업체들에는 치명적이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공장을 확대하거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밝혔다. 》
  
한국경제가 소비, 기업투자, 수출이 한꺼번에 부진에 빠진 ‘트리플 슬럼프’로 성장활력을 잃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국민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고 있고, 기업들은 각종 규제와 계속되는 노동 이슈 탓에 섣불리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홀로 한국경제를 떠받치던 수출마저 성장세가 꺾였다. 올해처럼 연간 3%의 ‘저성장 기조’가 지속될 경우 2028년에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진입이 가능할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 굳게 닫힌 국민들의 지갑

22일 본보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의뢰해 국내 경제성장의 3대 축인 소비, 기업투자, 수출의 연간 증가율을 비교 분석한 결과 지난해 이들 지표는 1994년(투자는 1995년)과 2004년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비증가율은 1994년 12.6%였지만, 2004년 5.2%, 지난해 2.4%로 20년 사이 5분의 1 수준으로 낮아졌다. 노후 대비에 대한 부담 및 가계부채 증가가 원인으로 꼽힌다. 실제 전체 소득 대비 조세·사회보험·연금 지출액 비율은 1994년과 2004년 각각 2.7%에서 지난해는 3.3%까지 올라갔다.

서울 강남구에서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는 우모 씨(58)는 월 800만∼1000만 원을 번다. 하지만 매달 300만 원 정도를 빚을 갚는 데 쓴다. 우 씨는 “경기가 좋을 때는 가족들의 쇼핑이나 외식에 꽤 많은 돈을 썼다”며 “지금은 사업 환경도 불투명하고 자식들 결혼자금도 모아 놓아야 해 최대한 저축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우 씨와 같은 50대들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 대비 소비지출 비율)은 2004∼2008년 평균 78.9%에서 2010∼2014년 72.2%로 6.7%포인트나 낮아졌다. 홍성일 전경련 경제본부 재정금융팀장은 “기대수명이 늘면서 노후를 대비한 자산 축적을 위해 소비절약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 기업투자의 양과 질 모두 저하

기업들도 잔뜩 웅크린 채 사업 확장을 자제하고 있다. 1995년 국내 대기업의 전년 대비 투자 증가율은 33.0%였지만 2004년 22.1%로 낮아졌고, 지난해는 ―2.3%로 고꾸라졌다.

우선은 불황으로 인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든 것이 결정적이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규제개혁과 노동 경직성도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는 주요한 배경이다. 실제 전경련이 최근 56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5년 규제개혁 인식조사’ 결과 정부의 규제개혁 성과에 만족한다고 답변한 기업은 7.8%에 불과했다.

또 국내 대기업들은 높은 생산원가와 강성노조를 피해 생산기지를 속속 해외로 옮기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0년까지 휴대전화를 전량 국내에서 생산하다 2001년 중국을 시작으로 해외 5개국에 휴대전화 공장을 세웠다. 올해 주 매출원이 될 ‘갤럭시S6’는 대부분 베트남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국내 기업의 해외직접투자 규모는 1995∼2004년 459억 달러에서 2005∼2014년에는 2231억 달러로 약 5배로 불어났다.

이처럼 대기업들의 해외 이전 러시 속에 국내에서는 ‘투자의 질’도 악화되고 있다. 제조업 설비투자액 중 신규 설비투자 비중은 2010년 78.4%에서 지난해 71.4%로 낮아진 반면 유지보수 비중은 같은 기간 11.2%에서 15.0%로 높아졌다. 공장을 짓거나 장비를 새로 들이지 않고 기존 시설을 고쳐 쓰는 기업이 많아진 것은 고용창출을 떨어뜨린다.

○ 수출까지 흔들…“고성장 드라이브 걸어야”

한국 경제성장 최후의 보루였던 수출마저 최근 흔들리고 있다. 월별 수출 규모(통관 기준)는 올 들어 3개월 연속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올해 연간 수출액이 2012년(―1.3%) 이후 3년 만에 다시 전년 대비 감소(―1.9%)할 것으로 내다봤다.

수출 단가도 크게 떨어졌다. 2010년을 100으로 놓고 봤을 때 지난해 전체 수출물가지수는 88.10(원화 기준)으로 낮아졌다. 특히 주력 수출품목인 전기·전자기기의 경우 같은 기간 100에서 65.68까지 폭락했다. 중국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군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8000달러였던 한국이 올해부터 매년 3% 경제성장률을 유지한다고 하면 2028년 4만 달러를 겨우 넘어서게 된다. 만약 매년 2%씩 성장한다면 4만 달러 클럽은 2034년에나 진입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2017년부터 국내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2030년부터는 총인구마저 줄어들 것으로 보여 지금이 ‘선(先)성장정책’을 펼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한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한국처럼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에서 일자리나 투자를 하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서 아직 규제로 묶여 있는 금융, 의료, 관광 등 서비스 산업 선진화를 통해 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며 “규제가 개선돼 성장 드라이브가 걸리면 5%까지 성장률을 끌어올릴 여력이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황태호 taeho@donga.com·김창덕 기자
#한국경제#트리플 슬럼프#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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