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사 “거액 손실 못떠안아”… 검경 “테러-유괴 수사 차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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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3사, 수사기관에 자료제출 중단]

KT에 가입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동아일보 기자는 2일 KT의 고객센터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 가입 시 작성한 개인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상담원은 “전국의 KT 올레플라자(공식 대리점)에 신분증만 들고 가면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고, 실제 대리점 방문해 “수사기관 제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통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처럼 개인이 최근 6개월 사이에 어느 수사기관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자신의 개인정보를 열람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6개월이 지나면 수사기관 제공 기록 자체가 폐기된다. 문의 고객이 늘자 KT는 고객센터 상담원들에게 안내 매뉴얼도 배포했다.

○ “간첩도 ‘내 수사 하나?’ 열람할 판”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수사기관 자료 제출 여부를 고객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통사로선 문의하는 고객이 간첩이나 강도, 유괴범 등 범죄 피의자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본인 확인만 되면 다 알려준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간첩에게 ‘당신 수사 받고 있으니 달아나라’고 알려주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최근 일련의 헌법재판소 결정과 법원 판결에서 비롯됐다. 2010년 “해군과 이명박 대통령이 짜고 천안함을 폭파시켰다”는 글을 MBC, SBS 시청자 게시판에 올린 최모 씨(45)에 대해 경기지방경찰청은 각 방송사에서 최 씨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확보해 수사에 착수했다. 이를 계기로 “수사기관이 요청하면 사업자는 그 요청에 따를 수 있다”고 규정된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개정 전 제54조)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이 제기됐고 헌재는 2012년 8월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취득이 강제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헌법소원 대상이 되는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각하했다. ‘따를 수 있다’는 법조항 문구에 따라 이통사들이 자료 제공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결정이었다.

2010년 네이버 카페에 ‘회피 연아 동영상’을 올린 누리꾼이 구속된 사건이 이번 파문의 도화선이 됐다. 이 누리꾼은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끝나고 선수단이 귀국할 때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김연아 선수를 포옹하려 하자 김 선수가 피하는 듯하게 보이도록 편집한 동영상을 올렸다. 유 전 장관의 고소에 따라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네이버에서 그의 개인정보를 넘겨받았다. 2012년 서울고법은 헌재 결정과 같은 맥락에서 자료를 넘겨준 이통사에 책임을 묻는 판결을 내렸다. 네이버가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누리꾼에게 50만 원을 배상하라는 것. 아직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 후 네이버는 수사기관에 통신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 검찰·경찰 “수사 무력화” 우려

1월 19일 나온 이동통신 3사에 대한 서울고법 판결은 수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내용이었다. 이통 3사를 겨냥한 정보공개 청구 소송에서 법원은 이통사에 위자료 20만∼30만 원씩을 물어주도록 했다. 일련의 소송은 참여연대와 법무법인 덕수를 포함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이끌었으며 참여연대는 네이버 판결과 함께 묶어 집단소송인단을 모집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통사들은 거액의 배상을 감수하면서 수사 보안까지 지켜줄 이유가 없어 고객 문의만 들어오면 자료 제공 여부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두 사건이 항소심 판결대로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이통사들은 수조 원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이통사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그 부담을 모두 이통사들이 지라고 한다”면서 “정부는 쉬쉬하고 국회는 법 개정에 뒷전”이라고 푸념했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 등 수사기관들은 현재로선 손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수사기관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내사, 수사를 진행할 때 신원 확인을 위한 기초 자료로 통신자료를 광범위하게 활용해 왔다. 통신자료를 바탕으로 피의자를 특정하고 주변 조사를 한 뒤, 이런 내용을 담아 통화기록과 자택 및 금융계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청구하는 방식으로 수사가 이뤄졌다. 이 때문에 2013년 검찰이 받은 휴대전화의 통신자료가 200만 건, 경찰은 510만 건에 이른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황인자 의원이 경찰청에서 확보한 ‘통신자료 필요성 및 영장 요구 시 문제점·대응방안’ 자료에 따르면 “통신자료 제공 거부 시 신원을 특정하기가 불가능해 수사 착수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통신자료에 영장을 요구하면 수사의 장기화가 불가피할 뿐 아니라 테러 유괴 등 긴급을 요하는 상황에서 대처가 어렵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2013년 발생한 인천 모자 살인사건에서 피의자가 평소 사용하는 게임 아이디 등을 특정해 접속 장소(대구역 인근 여관)에서 신속히 체포한 사례 등을 제시했다. 이런 수사가 앞으로는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얘기다. 윤해성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개인정보 유출 문제는 엄격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지만 수사와 국가 안보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면서 “양자가 형평성을 얻는 쪽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우열 dnsp@donga.com·변종국 기자
#이통3사#자료제출#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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