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 강도미수 30대, 심리전문가 등 도움받게 첫 석방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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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금 대신 치료… 법원 ‘힐링판결’

A 씨(34)는 지난해 5월 길 가던 40대 주부를 칼로 위협해 금품을 빼앗은 혐의(강도미수)로 재판에 넘겨졌다. 노숙생활을 하며 일주일간 굶다가 죽기 전에 강도짓을 해서라도 배불리 먹고 자살하려는 생각이었다. 1심 재판부는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김상준)는 사건 기록을 검토하다가 A 씨의 어두운 ‘과거’를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A 씨는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가세가 기울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A 씨는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에 다니던 친동생과 갈등을 빚다 집을 나왔다. 이후 사회와 접촉을 끊고 컴퓨터 게임과 술에 빠져 지내다가 방세를 못 내 쫓겨났고 결국 범죄까지 저지르게 됐다.

재판부는 A 씨의 범행을 정신건강의 문제로 보고 지난달 9일 교도소에 수감된 A 씨를 보석으로 석방하는 대신 ‘특별한 조건’을 걸었다. A 씨의 정신치료와 재기를 도울 조력자를 구해오도록 한 것. 재판부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 A 씨를 시립 재활센터에 연결해주고 복지사와 심리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3일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A 씨는 “인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치료를 받고 장애인복지활동 자격증을 취득해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A 씨를 돕는 심리전문가 김주희 박사는 “재판 과정이 ‘사이코 세러피(정신치료)’ 같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두 차례 공판을 더 열어 A 씨의 치료 가능성을 계속 관찰하기로 했다.

A 씨와 같이 경미한 정신장애로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구금하지 않고 치료조건부 보석과 집행유예를 선고해 사회 적응을 돕는 ‘정신건강법원’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신건강법원은 선진국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치료 사법(司法)’의 일환으로, 법원이 법리만 따져 선고하는 데 머물지 않고 범죄자의 심리를 면밀히 살펴 사회 복귀를 적극적으로 돕는 제도다. 정신장애나 보살핌 부족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수형을 마친 후 적절한 치료나 서비스를 받지 못해 비슷한 범죄를 다시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미국 독일 등 사법 선진국에서는 법원과 지역 공동체들이 협력해 정신장애 범죄자 치료를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지만 한국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그나마 국내 유일한 치료감호소인 국립법무병원도 수용 인원이 2008년 723명에서 2012년 1021명으로 급증해 정원을 넘어섰다.

이승호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통상적인 형벌 부과만으론 범죄자에게 내재된 정신문제를 치유하지 못해 재범하는 ‘회전문 범죄자’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법심리학회는 지난달 30일 학술대회에서 ‘한국형 정신건강법원’ 모델로 ‘치료조건부 보석제’를 소개했다. 법원이 치료에 충실히 따를 것을 전제로 구속 피고인을 석방해 감독하고, 선고 후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관이 치료 상황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판결문에 명시하는 것이다. 김상준 부장판사는 “A 씨는 지역사회에 위탁해 보석을 허가한 첫 사례다. 개선 여지가 있는 정신장애 범죄자 치료를 위해 ‘치료 전담 재판부’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정신장애 강도미수#정신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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