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주/新명인열전]“대나무 깎을땐 무념무상… 명상이 따로 필요없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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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윤성재 반딧불공작소 대표

제주지역의 등공예가인 윤성재 대표가 감귤 선과장을 개조한 작업장에서 입춘굿놀이에 등장할 대형 돌하르방 등을 만들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지역의 등공예가인 윤성재 대표가 감귤 선과장을 개조한 작업장에서 입춘굿놀이에 등장할 대형 돌하르방 등을 만들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대나무를 깎을 때는 무념무상의 세상입니다. 칼을 쓰기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수행과 명상의 시간이나 다름없어요. 꿈꾸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나면 오로지 대나무를 깎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서울이 고향인 ‘반딧불공작소’ 윤성재 대표(35)는 제주의 ‘등불’이 되고 싶어 2010년 이주했다. 윤 대표는 제주지역에서 독보적인 전통 등(燈)공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서귀포시 중문동 감귤 선과용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윤 대표를 22일 만났다. 제주의 대표 상징물 중 하나인 돌하르방 형태의 등 조형물 제작에 한창이었다.

“입춘을 맞아 제주에서는 굿판이 펼쳐져요. 올해 농사가 잘되도록 농사의 신(神)에게 비는 행사입니다. 여기에 쓸 대형 등을 만들고 있어요. 2012년 처음 행사장에 선보였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 전통 등공예와의 인연

그가 만들고 있는 등은 전통 양식에서 다소 벗어나기는 했다. 골조를 대나무가 아닌 질기면서도 쉽게 휘어지는 알루미늄 강선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환하게, 때론 은은하게 비치는 불빛도 각지(등잔)불이 아닌 전깃불이다. 윤 대표는 “현대에 맞게 조금씩 변형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과거 등공예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모른다는 점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등 문화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안다. 사찰에 등이 걸린 것은 당연하고 일반 가정에서도 과거에 급제하면 잉어등,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호랑이등을 달았다”고 밝혔다. 그는 민속학자인 심우성 씨(81)의 조언을 받아 전통 등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가 쇠퇴하면서 자연스레 등공예도 내리막길을 걸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15년 전쯤 전통 등공예를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옛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청계천 등축제 등이 인기를 끌면서 일반인 사이에서도 등공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윤 대표가 등공예를 접한 것은 2007년. 대학 중퇴 후 스쿠버다이빙 강사로 섬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공연기획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착에 실패하고 서울로 돌아가다 들른 경남 진주에서 ‘유등축제’와 맞닥뜨리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정이 느껴지는 제주의 사람 냄새가 좋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유등축제를 본 순간 제주사람들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 신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서울로 가 한국전통등연구원에 들어갔다. 무수한 밤을 지새우며 등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평생 열정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배고픔마저 잊었다. 꼬박 8∼9시간을 앉아 대나무를 깎아도 고달픈 줄 몰랐다. 그렇게 3년이 흐른 뒤 2010년 다시 제주를 찾았다. 빈손이 아니었다. 전통 등공예가라는 직함을 달았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에서 입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제주올레걷기축제에 말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이 공연무대에 설치되면서 대중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불교연합회 연등행사, 프린지페스티벌, 쇠소깍 환경축제, 서울 등축제 등으로 뻗어나갔다. 윤 대표가 등공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등공예를 대표하는 한국전통등연구원, 전영일공방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제주지역에서는 등공예의 ‘씨’를 뿌렸다.

○ 화려한 도약을 꿈꾸며

윤 대표는 지난해 제주시 삼도2동 문화예술의 거리에 ‘쿰자살롱’을 오픈했다. 이곳에서 다양한 전공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고 정기적인 워크숍 및 전시를 통해 지역주민들과 융화하고 소통하는 길을 만들고 있다. 그는 제주에 정착하는 문화예술인들과 지역주민이 함께하면 명품 콘텐츠 개발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공예 작가들의 모임인 ‘마불림’(장마와 곰팡이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의식을 뜻하는 제주방언)을 만들었다. 등공예의 확산은 물론이고 새로운 형식의 축제를 기획하기 위해서다.

“제주 등축제를 위해 한발 한발 나가고 있어요. 관의 지원을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야 자생력이 있다고 봐요. 지역주민들이 직접 캐릭터를 만들고 제작하고 행진하는 축제로 꾸며집니다. 캐릭터는 당연히 등으로 만들어요. 다만 설문대할망, 자청비처럼 이미 제주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마을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신화 주인공을 새롭게 만들 생각입니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축제를 그리고 있습니다.”

윤 대표는 4월경 제주시 한경면 노리갤러리에서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전시한다. 화산이 빚은 제주 돌에다 구름, 바람을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생활도구나 인테리어소품 수준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등공예를 축제,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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