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도 교통표지판도 없다… 사고는 20분의 1로 줄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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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 꺼! 반칙운전]<7>네덜란드 드라흐턴市의 기적

유럽의 대표적 교통선진국인 네덜란드의 소도시 드라흐턴에는 신호등이나 운전방식을 규제하는 표지판이 없다. 차와 자전거, 보행자가 함께 소통하며 도로를 사용한다. 인구 6만 명인 드라흐턴의 연평균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한 건 남짓해 교통안전시스템보다 서로 양보하는 교통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유공간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유럽의 대표적 교통선진국인 네덜란드의 소도시 드라흐턴에는 신호등이나 운전방식을 규제하는 표지판이 없다. 차와 자전거, 보행자가 함께 소통하며 도로를 사용한다. 인구 6만 명인 드라흐턴의 연평균 교통사고 발생건수는 한 건 남짓해 교통안전시스템보다 서로 양보하는 교통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유공간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 도시의 모든 신호등이 사라졌다. 정지 양보 등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대부분 치워졌다. 중앙선도 없어졌다.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하다”고 했다. 차량 운전자들은 “도로 전체가 보행자들이 날뛰는 횡단보도가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보행자는 “집 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교통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게 됐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신호등 없는 이상한 도시’ 네덜란드 북부 소도시 드라흐턴의 이야기다. 올해로 도시의 모든 신호체계를 없앤 지 꼭 10년째. “교통사고의 천국이 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드라흐턴이란 도시는 ‘교통안전’의 대명사가 됐다. 》

○ 신호등이 없는 이상한 도시

5월 1일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해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은 A6 고속도로를 내리 6시간을 달려서야 인구 6만 명의 소도시 드라흐턴에 닿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도심에 들어서자 검은 아스팔트 대신 지그재그 모양의 빨간 벽돌이 촘촘히 박힌 도로가 나타났다. ‘이곳은 안전 표지판이나 신호등이 없다’는 일종의 경고 표시였다.

‘신호등이 없으면 어떻게 하란 거야.’ 운전대를 잡은 기자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주로 신호등을 보며 운전했던 한국의 도로와는 딴 세상이었다. 교차로가 나올 때면 무조건 멈춰 좌우를 살펴야 했고 중앙선도 없어 수시로 차의 위치를 체크해야 했다. 도로 위에는 차량과 자전거가 함께 달려 좀처럼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사고가 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비상등을 켠 채로 5분을 달리다 드라흐턴 중심가인 바위테버흐 시장 사거리 인근 공용주차장에 간신히 차를 세웠다.

드라흐턴의 도로는 2003년까지 여느 한국의 도로와 다르지 않았다. 사거리는 한국의 교차로처럼 네모꼴이었고 신호체계도 우리나라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신호등이나 운전방식을 규제하는 표지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신기할 정도로 유연하게 교차로를 통과했다. 모든 차량은 교차로로 진입하기 전에 먼저 속도를 줄였다. 운전자들은 그러면서 각자 자신의 우측을 바라봤다. 자신이 먼저 교차로에 들어섰다 해도 우측에 교차로로 진입하는 차량이 있으면 멈춰서 양보한다. 철저하게 우측 차량에 우선통행권을 주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통행량이 많은 교차로의 경우 십자형이 아닌 회전교차로(원형교차로) 형태로 된 곳이 많다. 여기서는 먼저 회전교차로에 진입한 차량이 우선권을 가졌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제각기 갈 길을 갔다.

매일 수천 명의 보행자와 자전거, 2만5000여 대의 차량이 지나는 라베이플레인 사거리에서 만난 에델 씨(66·여)는 “우리 도시에서는 보행자가 최우선이고 두 번째가 자전거, 맨 마지막이 차량이다”라며 “신호가 없는 대신 이 약속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고 했다.

○ 교통 시스템보다 중요한 운전자의 인식

드라흐턴의 신호등이 사라지게 된 것은 ‘교통신호와 표지판이 오히려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운전자가 신호에 의존할수록 도로 주변 상황에 무감각해지고 위험요소를 파악할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교통신호가 많을수록 운전자는 ‘관리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신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동적 운전자가 되지만 신호가 없으면 ‘직접 질서를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능동적 운전자가 된다. 함께 드라흐턴을 돌아본 한국교통연구원 김영호 박사는 “사실 나조차도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도로가 있을 때면 신호체계를 바꾸거나 표지판 등 안전장치를 추가하려 했지,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며 “교통신호가 운전자의 책임이나 주의 의무를 빼앗는다는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드라흐턴의 교통체계를 설계한 네덜란드 교통공학자 한스 몬더만(사망)은 2004년 8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도로에는 ‘앞으로 가세요’ ‘우리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등의 메시지가 넘친다”며 “이는 운전자의 책임감을 없애는 위험한 메시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호나 표지판 등으로 자동차와 자전거, 보행자를 철저히 분리하고 규제하는 기존 도로 시스템 대신 서로 소통하는 자율적 공간을 만드는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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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흐턴의 인구는 6만여 명. 우리나라로 치면 ‘군(郡)’ 정도의 크기다. 신호등을 모두 없앤 뒤 드라흐턴의 연평균 사고 건수는 20여 건에서 1건 남짓으로 줄었다. 평균 10km의 감속 효과가 있다는 과속방지턱을 없애고 제한속도도 두지 않았지만 도시를 지나는 차량의 평균 주행속도는 오히려 60km에서 30km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교통 흐름은 신호대기시간이 없어지면서 버스의 교차로 통과시간이 짧아지는 등 오히려 더 좋아졌다. 드라흐턴 시민 던 씨(33)는 “처음 신호등이 없어졌을 때 많이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에 서로 조심하게 됐고 지금은 문화가 됐다”고 했다.

기자는 드라흐턴의 곳곳을 하루 종일 돌아보고 나서야 ‘신호등 없는 도시’에 적응할 수 있었고 비상등을 켜지 않고도 운전할 수 있었다. 규칙은 간단했다. 과속은 금물, 교차로에서는 일단 정지, 보행자가 최우선. 모두 한국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 배웠던 내용이었다.

드라흐턴=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네덜란드#드라흐턴시#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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