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자락까지… 아라온, 대한민국의 새로운 영토를 열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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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항로 개척 닻 올린다
■ 남극-북극으로… 쉼없는 전진

아라온호는 지난해 8월 북극 탐사를 위해 알래스카 위쪽의 축치 해를 항해했다. 아라온호에 승선했던 극지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이 해빙 위에 내려 연구재료로 쓸 얼음을 수집하고 있다. 극지연구소 제공
아라온호는 지난해 8월 북극 탐사를 위해 알래스카 위쪽의 축치 해를 항해했다. 아라온호에 승선했던 극지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이 해빙 위에 내려 연구재료로 쓸 얼음을 수집하고 있다. 극지연구소 제공
《 2003년 12월 대한민국은 남극 세종과학기지 인근에서 동료를 구하려다 고무보트가 전복돼 숨진 전재규 씨를 한마음으로 추모했다. 그 열기에 힘입어, 전 씨의 ‘혼’을 실어 탄생한 배가 대한민국의 첫 쇄빙선 ‘아라온호’다. 아라온호는 2009년 진수 후 남극대륙 기지 건설, 북극해 자원 탐사 등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있다. 내년에는 북극 항로 개척에도 나선다. 다음 달 5일 다시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보포트 해로 향하는 아라온호의 지난 1년 중 극적인 순간들을 소개한다. 》

“선장, 조금만 더 들어갑시다.”

“단장님,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1만5000t이나 되는 짐을 옮기려면 여기서 기지까진 너무 멀어요.”

“그래도 안 됩니다. 얼음을 더 깨고 들어갔다간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초순 어느 날. 아라온호 선장실에서는 몇 시간째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의 김예동 남극대륙기지건설단장(59)은 전진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김봉욱 선장(51)은 꿈쩍도 안 했다. 대한민국 제2남극기지인 ‘장보고 과학기지’가 들어설 남극대륙 동남쪽 테라노바 만을 5km 앞둔 지점이었다.

○ ‘얼음 속 호수’를 만들다

아라온호는 지난해 11월 하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리틀턴 항에서 현대건설 소속 인력 120여 명을 태웠다. 승선 인원은 연구원들을 포함해 모두 160명에 달했다. 그달 30일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난 아라온호는 12월 11일 4000km 떨어진 테라노바 만 인근에 도착했다. 7000t 급인 아라온호의 뒤엔 1만5000t에 달하는 건설 기자재를 실은 내빙선 수오미그라흐트 호(1만8000t 급)가 따르고 있었다. 내빙선은 얼음에 부딪혀도 손상을 입지 않지만 직접 얼음을 깨지는 못하기 때문에 아라온호가 얼음을 깨 만든 길을 따라 운항한 것이다.

문제는 하역이었다. 남극의 12월은 여름이지만 아직 바다가 덜 녹아 화물 운반용 바지선을 띄울 수가 없었다. 건설단은 해안까지 배를 최대한 접근시킨 뒤 두꺼운 얼음 위에 짐을 내려놓고, 이를 기지까지 끌고 가기로 했다. 그러려면 적어도 해안 1km 앞까지는 화물선이 접근해야 한다는 게 김 단장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 선장은 배와 승선 인원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당시 아라온호 앞에는 두께 2m의 해빙(海氷)이 가로막고 있었다.

선장실의 격론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둘은 결국 아라온호를 기지 1.2km 전방까지 끌고 가는 데 합의했다. 그때부터 아라온호의 눈부신 활약이 펼쳐졌다. 길이가 180m에 이르는 거대한 화물선이 방향을 틀려면 적어도 가로 세로 500m의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아라온호는 300m 이상 후진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해빙 위에 올라타는 ‘점핑’ 방식으로 얼음을 깼다. 꼬박 이틀에 걸친 작업 끝에 2만5000m²의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김 단장은 “아라온호가 얼음을 깨며 전진하는 모습은 볼 때마다 감동적”이라며 “당시 쇄빙 작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오미그라흐트 호는 12월 13일 안전하게 정박했다. 백야(白夜)가 계속된 남극에서 대한민국의 장정들은 쉼 없이 건설 기자재 하역에 매달렸다. 발전동, 창고동, 숙소동이 차례로 들어섰다. 남극에 겨울이 찾아오던 3월 9일 공사 인력과 연구원 전원이 철수했다. 장보고 기지는 60% 가까이 지어진 상태였다.

○ 북극점을 통과할 뻔하다


아라온호는 본래 연구선이다. 그 때문에 남극대륙 기지에서 철수한 뒤에도 올해 3∼6월 칠레 최남단 도시인 푼타아레나스와 남극반도 킹조지 섬에 위치한 세종과학기지를 오가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지난해 북극 탐사 때도 아라온호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역사에 남길 뻔했다. 아라온호는 지난해 8월부터 약 40일간 100만 km²의 북극 해역을 탐사했다. 이동 거리만 6700km에 달했다. 아라온호가 항해하던 미국 알래스카 위쪽의 축치 해는 예년에 비해 해빙이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지난해 여름은 북극 해빙의 넓이가 위성 관측 방법이 동원된 1979년 이후 가장 작은 342만 km²에 불과했다.

광복절이던 8월 15일 선실 내부가 술렁거렸다. 아라온호가 어느덧 북위 82도를 넘어 올라간 것이었다. 북극점(북위 90도)까지 남은 거리는 800여 km에 불과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까지 왔으면 북극점을 한 번 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북극 탐사를 이끌던 극지연구소 강성호 극지기후연구부장도 고민에 빠졌다. 몇 년 전 중국 쇄빙선이 북극점에 도전했다 북위 89도 지점에서 포기했던 사실도 떠올랐다. 대한민국 극지 연구의 능력을 세계에 다시 한 번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기존 연구 일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강 연구부장은 “북극점을 통과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수년간 북극해 탐사를 준비해 온 연구원들의 연구 일정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라온호의 북극해 탐사에는 한국 중국 일본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총 10개국 연구원이 참여했다. 전 세계 어느 결빙 해역에서도 해양학, 고환경, 지구물리, 지질학 연구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쇄빙선은 아라온호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5척 정도에 불과하다.

○ 다시 출발점에 서다

아라온호는 지난해 10월 인천항을 떠난 지 8개월 만인 지난달 21일 전남 여수항에 입항했다. 거의 1년간 쉼 없이 해빙과 사투를 벌여 온 셈이다. 아라온호는 약 한 달간 국내 연안을 돌며 지친 몸을 수리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현재 인천항에서 막바지 점검 중인 아라온호는 다음 달 5일 다시 북극해로 떠난다.

최근 아라온호의 3번째 선장이 된 양종열 씨(40)는 “극지 연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투자”라며 “그 핵심인 아라온호를 이끌게 된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맹활약한 아라온호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에도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9월까지 캐나다 연구팀과 함께 보포트 해 주변 가스하이드레이트 탐사를 진행한다. 11월에는 또다시 화물선을 남극대륙의 테라노바 만까지 ‘에스코트’해야 한다. 이어 내년 8월 북극 항로의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아라온#북극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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