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여기는 신문박물관]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회보,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모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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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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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협성회회보(왼쪽)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의 회보로,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신문박물관 제공
국내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침탈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협성회회보(왼쪽)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의 회보로,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신문박물관 제공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은 언제부터 매일 발행했을까요? 시작을 알려면 구한말에 나온 ‘협성회회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협성회회보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協成會)에서 발행한 회보입니다.

배재학당은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가 1885년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여기서 강의를 맡았던 서재필(徐載弼·1864∼1951) 선생의 지도 아래 사회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회를 전개하여 민중의 큰 호응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토론 내용과 결과를 널리 알리며 개화정신을 고취시킬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느껴 1898년 1월 1일 협성회회보를 창간했습니다.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사회비판 기능을 갖춘 주간신문으로 시작해서 이후 일간지로 발전합니다. 창간 당시 주필은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죠.

협성회는 20세 남짓의 젊은 나이로 선진 지식을 터득한 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사회발전에 뜻이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개방적 사회단체였습니다. 회보의 편집체제와 내용은 종합지에 가까웠기에 일반 민중을 포함해 폭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발행하고 판매했습니다.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고 순수하게 민간의 힘으로 운영한 점이 특징입니다. 모든 면이 한글 전용이었고요.

1898년 4월 2일 제14호까지는 주간으로 발행하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큰 호응을 얻자 같은 해 4월 9일부터는 ‘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국내 최초의 일간이 됐습니다. 매일신문보다 2년 앞선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격일로 주3회 발행했습니다.

매일신문은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토지 및 관광 분야의 이권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외교문서가 부당하다고 5월 16일자에 폭로했습니다. 이같이 열강의 항의와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국주의 국가의 이권쟁탈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이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는 시기에 매일신문은 시대상황을 직시하여 설득력 있는 논설을 싣고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등 혁신을 이끄는 민간신문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협성회회보에 대한 폭 넓은 독자층의 커다란 관심이 있었기에 매일신문이라는 일간지로의 변화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령 278호인 1899년 4월 3일자까지 1년 3개월 동안 발행하다가 정치정세의 변화와 경영난을 이유로 폐간됐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매일신문은 학생들로부터 시작돼 자주와 개화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새로운 언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다른 일간신문의 발행을 이끈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데도 의의가 있습니다.

최원경 신문박물관 연구원
#배재학당#협성회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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