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문 부서지는 소리가 났어요. 인민군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더군요. 제가 울면서 쫓아나갔는데 지프 두 대에 두 분을 나눠 태운 채 사라졌습니다.”
60여 년 전을 회상하는 이무헌 씨(71)의 눈가에 금세 이슬이 맺혔다. 1950년 7월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는 할아버지 이헌 씨와 할머니 황기성 씨가 인민군에 강제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이제 가면 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끌려가기 직전 할아버지가 이 씨를 끌어안고 남긴 말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됐다.
이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부가 2일 6·25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인정한 민간인 55명 가운데 유일한 부부다. 3일 이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60년이 넘도록 기다려 왔는데 섣불리 뭔가 말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어떡하느냐”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이 씨는 통일부에서 확인전화를 받은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할아버지는 3·1운동에 참여했다 투옥됐습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투옥됐고요.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 때 당원으로도 활동하셨죠.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월북한 게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었습니다.”
1995년 할아버지가 ‘숨은 독립유공자’인 만큼 관련 서류를 제출해 인정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기한을 한 달도 안 남기고 아버지 이석문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바람에 제출 시기를 놓쳤다. 2006년 다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보훈처에 신청했지만 “사망 시기 등 (독립)활동 이후 행적이 불분명해 독립유공자 인정이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다. 3년이나 더 애를 쓴 끝에 2009년 겨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행적에 대해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데는 또다시 2년이 걸렸다.
이 씨는 그동안 제출했던 탄원서와 편지, 관련 서류를 가방에서 꺼내보였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는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이헌 씨와 황기성 씨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등이 보였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뒷장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함께 있었다. “북한에 가서 김 위원장을 만날 때 전해줬으면 해서 썼죠. 남들이 다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내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편지에는 ‘할아버지 이헌과 할머니 황기성이 언제 돌아가셨는지를 알려 달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 유언이셨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을 꼭 알아내 그 날짜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지요.”
이 씨는 목이 메는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라진 뒤 이 씨의 아버지는 집을 팔고 그 돈으로 근근이 장사를 하며 살았다. 생활고로 친척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씨가 끝까지 한국에 남은 건 아버지 유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명예를 되찾았으니 이젠 저세상에 가서 제가 할 말이 있죠. 하지만 아버지 유언을 지켜야 하는데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를 못하니….” 이 씨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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