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헌 씨 손자 이무헌 씨의 ‘되찾은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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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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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서 인민군에 끌려갔는데 ‘납북’ 인정에 61년이라니…”

전쟁 중 가족사진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무헌 씨는 할아버지 이헌 씨의 상반신 사진(왼쪽)과 한국민주당 창당 당시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오른쪽 사진 앞줄에 도포를 입은이가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그 오른쪽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이헌 씨는 뒷줄 오른쪽에 있다. 이무헌 씨 제공
전쟁 중 가족사진은 대부분 사라졌다. 이무헌 씨는 할아버지 이헌 씨의 상반신 사진(왼쪽)과 한국민주당 창당 당시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오른쪽 사진 앞줄에 도포를 입은이가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그 오른쪽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이헌 씨는 뒷줄 오른쪽에 있다. 이무헌 씨 제공
“한밤중에 문 부서지는 소리가 났어요. 인민군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더군요. 제가 울면서 쫓아나갔는데 지프 두 대에 두 분을 나눠 태운 채 사라졌습니다.”

60여 년 전을 회상하는 이무헌 씨(71)의 눈가에 금세 이슬이 맺혔다. 1950년 7월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는 할아버지 이헌 씨와 할머니 황기성 씨가 인민군에 강제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내가 이제 가면 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끌려가기 직전 할아버지가 이 씨를 끌어안고 남긴 말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됐다.

이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부가 2일 6·25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인정한 민간인 55명 가운데 유일한 부부다. 3일 이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60년이 넘도록 기다려 왔는데 섣불리 뭔가 말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어떡하느냐”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이 씨는 통일부에서 확인전화를 받은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할아버지는 3·1운동에 참여했다 투옥됐습니다.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투옥됐고요.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 때 당원으로도 활동하셨죠. 그런데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월북한 게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었습니다.”

1995년 할아버지가 ‘숨은 독립유공자’인 만큼 관련 서류를 제출해 인정받으라는 통지를 받았다. 하지만 기한을 한 달도 안 남기고 아버지 이석문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바람에 제출 시기를 놓쳤다. 2006년 다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보훈처에 신청했지만 “사망 시기 등 (독립)활동 이후 행적이 불분명해 독립유공자 인정이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다. 3년이나 더 애를 쓴 끝에 2009년 겨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행적에 대해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데는 또다시 2년이 걸렸다.

이 씨는 그동안 제출했던 탄원서와 편지, 관련 서류를 가방에서 꺼내보였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는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이헌 씨와 황기성 씨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 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등이 보였다. 노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뒷장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가 함께 있었다. “북한에 가서 김 위원장을 만날 때 전해줬으면 해서 썼죠. 남들이 다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내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편지에는 ‘할아버지 이헌과 할머니 황기성이 언제 돌아가셨는지를 알려 달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2일 정부 결정으로 조부모의 납북 사실을 인정받은 이무헌 씨가 3일 오후 인천 연수구 송도동 자택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관련 서류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일 정부 결정으로 조부모의 납북 사실을 인정받은 이무헌 씨가 3일 오후 인천 연수구 송도동 자택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관련 서류를 펼쳐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아버지 유언이셨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을 꼭 알아내 그 날짜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셨지요.”

이 씨는 목이 메는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라진 뒤 이 씨의 아버지는 집을 팔고 그 돈으로 근근이 장사를 하며 살았다. 생활고로 친척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씨가 끝까지 한국에 남은 건 아버지 유언대로 ‘할아버지 할머니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명예를 되찾았으니 이젠 저세상에 가서 제가 할 말이 있죠. 하지만 아버지 유언을 지켜야 하는데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를 못하니….” 이 씨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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