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스터디/영화, 생각의 보물창고]드래곤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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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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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꿈꾼다면 입보다 가슴을 열어라

《하이디 라이트라는 사람을 혹시 아시나요?
‘TV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국내에 알려지게 된 이 푸른 눈의 미국인 여성은 동물과 말을 나눌 줄 아는 이른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animal communicator)’입니다. 그는 1년이 넘도록 건물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강아지에게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있었는지를 알아내는가 하면, 역시 1년여 동안 벽만 쳐다보는 이상한 강아지에 얽힌 사연도 기가 막힐 만큼 정확하게 밝혀내지요. 그럼 이 하이디란 여성은 동물의 말을 할 줄 아는 기이한 능력이 있는 걸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하이디는 동물들과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눈을 쳐다보고 그들의 체온을 느끼면서 교감하려 합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치유해 주려 노력하지요. 이런 과정에서 하이디는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알게 되고 그들과 마음으로 말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통이란 그저 같은 언어를 쓰는 데서 비롯되는 건 아닙니다. 소통은 종(種)과 언어를 넘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 때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주목할 만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딸꾹질’이라는 뜻의 ‘히컵’이란 이름을 가진 겁쟁이 소년이 등장하는데요. 이 소년이야말로 하이디를 능가할 만큼 동물들과 교감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가 소통하는 동물은 다름 아닌 용(龍)이거든요.》
[1] 스토리라인

바이킹족이 사는 버크 섬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서운 용들과의 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바이킹족장은 아들 ‘히컵’을 자신과 같은 용맹한 전사로 키워내려 하지만, 과학 공부에만 관심 있는 히컵은 동료들로부터 겁쟁이 취급만 받을 뿐이지요.

용 무리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던 어느 밤. 히컵은 자신이 만든 돌팔매기를 작동시켜 얼떨결에 드래곤 한 마리를 ‘격추’시키는 공을 세우지만,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어줄 기색이 없습니다. 이에 자신이 잡은 드래곤을 찾아 산속을 헤매던 히컵. 이윽고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검은 용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아, 이건 기적이 아닐까요. 그가 잡은 것은 가장 날쌔고 무섭다고 하는 전설적인 용 ‘나이트 퓨어리’였던 것입니다.

꼬리날개 한쪽이 떨어져나가는 부상으로 더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용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접근하던 히컵은 용의 애절한 눈빛을 보고는 칼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곤 이빨이 없는 이 용에게 ‘투슬리스(Toothless)’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붙여주지요. 이때부터 히컵은 자신이 만든 특수꼬리날개를 투슬리스의 몸에 장착하고 그 등에 올라탄 채 꿈같은 비행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매정합니다. 둘의 우정을 알게 된 바이킹족은 “인간과 용의 우정은 불가능하다”면서 투슬리스를 제거하려 하고, 이에 맞서 히컵은 목숨을 걸고 투슬리스를 지키려 합니다. 그 순간 히컵은 용 무리들이 인간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던 비밀스러운 까닭을 알게 됩니다.

[2] 생각 키우기

흥미진진한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를 아시나요. 한 꼬마 열대어의 모험담을 담은 이 애니메이션과 ‘드래곤 길들이기’(이하 ‘드래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결핍’이란 키워드를 갖고 있단 점이지요. 꼬마 열대어 ‘니모’의 한쪽 지느러미가 선천적으로 작아 빠르게 헤엄칠 수 없었던 것처럼, ‘드래곤’의 투슬리스도 한쪽 꼬리 날개가 없어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두 존재 모두 치명적인 결핍을 가진 것이지요.

니모와 투슬리스는 자신들의 이런 결핍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종국에는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지느러미가 작다는 주위의 놀림을 극복하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자처했던 니모가 결국 목숨을 걸고 자신을 찾아 나선 아빠 물고기의 뜨거운 사랑을 깨달았던 것처럼, 히컵이 달아준 인공 꼬리날개를 달고 비로소 하늘을 온전히 날게 되는 과정에서 투슬리스는 히컵의 따스한 우정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지요. 결국 두 존재는 결핍을 통해 사랑을 알아갑니다. 특히 ‘드래곤’에서 히컵은 자기 탓에 꼬리날개 한쪽을 상실하게 된 투슬리스의 결핍을 결자해지(結者解之·일을 저지른 사람이 해결해야 함을 일컫는 고사성어)의 심정으로 메워주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래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결핍’이나 ‘우정’보다는 ‘소통’이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속마음과 생리와 사연을 알지 못했던 인간과 용 무리가 결국 서로를 알아가면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운명공동체가 되어간다는 점에서 그러하지요.

이런 맥락에서 ‘드래곤’의 가장 절묘한 설정은 투슬리스를 포함한 용 무리들이 인간의 말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십중팔구 ‘버젓이’ 인간의 말을 할 줄 압니다. ‘인어공주’ ‘라이언 킹’으로 대표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물론 ‘슈렉’ ‘마다가스카’ ‘쿵푸 팬더’ 같은 드림웍스 제작 애니메이션에서도 동물들은 인간의 말을 쓰며 자기들끼리 소통하거나 심지어는 인간과도 소통하지요.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품 속 용들은 인간의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며 동물에 가까운 기이한 소리만 낼 줄 알 뿐입니다. 다시 말해, ‘드래곤’ 속 용들은 다른 많은 애니메이션 속 동물들처럼 극단적으로 ‘의인화’되진 않았단 얘깁니다.

아니, 이런 설정이 뭐가 그리 대단한 선택이냐고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용들이 (비록 바이킹족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의 말로 의사소통을 했다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용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영화가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용 무리와 바이킹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결론에 자연스레 다다를 수가 있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관객들은 이 영화 속 용들을 ‘용’이 아닌 ‘또 다른 사람’으로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게 될 터이니까요. 하지만 ‘드래곤’의 용들은 인간의 말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용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욕망과 의도를 품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가 없지요.

바로 이겁니다! 이렇듯 한마디 말도 통하지 않는 ‘진짜 짐승’(용)들에게 용감히 접근해 결국엔 마음의 문을 열고 따스하게 껴안는 히컵의 모습을 통해 ‘소통은 종(種)과 언어를 뛰어넘는 소중한 가치’란 사실이 더욱 실감나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이지요. 소통이란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든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가치라는 점이 더욱 절실하게 드러난다는 얘기지요. 이는 이 영화가 ‘우정’과 ‘소통’이라는 뻔한 주제를 내세우면서도, 그런 주제의 진부함을 훌쩍 뛰어넘어 어느새 무척 새롭고 창의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지난 기사와 자세한 설명은 ezstudy.co.kr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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