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5>존경받는 지도층이 많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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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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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가진만큼 베푸는 상류층… 한국은 4대 의무조차 ‘나몰라라’

아이티 기부 전화 직접 받는 美스타들
로버트 드니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엘런 바킨(아랫줄 왼쪽부터) 등 미국의 유명 배우들이 지난달 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이티에 희망을’ 행사에 참여해 기부자들의 전화를 직접 받고 있다. 미국의 대중 스타들에게 이 같은 자선활동은 생활화돼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아이티 기부 전화 직접 받는 美스타들
로버트 드니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엘런 바킨(아랫줄 왼쪽부터) 등 미국의 유명 배우들이 지난달 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이티에 희망을’ 행사에 참여해 기부자들의 전화를 직접 받고 있다. 미국의 대중 스타들에게 이 같은 자선활동은 생활화돼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자선을 행복으로 아는 ‘그들’

대중스타-갑부 등 지도층, 기부를 사회적 의무로 여겨
110억 달러 재산가 소로스, 60억달러를 사회에 환원


“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입니다. 얼마나 도와주실 건가요.”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MTV와 ABC, CBS 등 미국의 주요 방송사에서는 ‘특별한’ 생방송 모금 프로그램이 열렸다. 아이티 지진 발생 10일 만에 한자리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미국 대중문화 스타 130여 명이 모여 ‘아이티에 희망을(Hope For Haiti Now)’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다. 이날 마돈나와 비욘세,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가수들이 공연에 나서는 동안 디캐프리오, 멜 깁슨,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등 영화배우들이 시청자들의 기부전화를 직접 접수했다. 이날 접수된 모금액만 5800만 달러(약 660억 원)에 달했다.

1일에는 셀린 디옹과 내털리 콜 등 팝스타 70여 명이 미국 할리우드의 한 스튜디오에 모여 ‘위아더월드(We Are the World)’를 다시 녹음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1985년 마이클 잭슨 등 가수 45명이 참여해 만들었던 노래를 25년 만에 다시 부른 건 지진 참사를 당한 아이티를 돕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미국의 대중 스타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스타들은 팬들이 만들어준 부와 명예를 자선활동을 통해 다시 팬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주요 조건 중 하나가 ‘존경받는 상류층’의 존재 여부다. 사회를 대표하는 상류층이 있고 이들이 솔선수범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한국의 ‘국격(國格)’이 낮다고 평가받은 것은 이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동아일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의 국격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사회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수준’ 항목의 점수는 7점 만점에 2.59점에 불과했다.

본보 1일자 A1면 참조
▶ 대한민국 國格, 사회갈등-정치가 깎는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한국의 상류층에는 오히려 ‘일반인만큼만 법을 지켜라’고 생각할 만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실종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 가진 사람이 베푸는 건 당연

전쟁터로 간 왕손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손이 2008년 2월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해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 당시 외신은 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사례로 꼽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
전쟁터로 간 왕손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 서열 3위인 해리 왕손이 2008년 2월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해 순찰을 돌고 있는 모습. 당시 외신은 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사례로 꼽았다. 동아일보 자료 사
프랑스 파리 근교 팔레조에 위치한 이공계 최고 명문 그랑제콜인 에콜폴리테크니크. 이 학교 학생은 나폴레옹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대로 1학년 때 군사교육을 받고 7월 14일 혁명기념일에 샹젤리제 군사행진에서 선두에 선다. 이들이 육군사관학교의 생도보다도 앞에서 행진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가장 똑똑한 사람들에게 가장 기대를 걸고 그만큼 많은 책임을 지운다는 뜻이다.

미국과 프랑스에 모두 오래 생활해본 소피 안 씨(56)는 “에콜폴리테크니크 학생은 졸업 후 각계에 진출해 간부가 된다. 세계 최초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프랑스지만 간부와 일반사원의 일하는 태도는 큰 차이가 난다. 사원은 퇴근시간이 되면 업무가 아무리 밀려있어도 칼같이 일에서 손을 떼지만 간부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고 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 말이다. ‘노블레스(noblesse)’는 귀족을 의미하고 ‘오블리주(oblige)’는 의무를 지운다는 뜻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을 보면 이 말은 귀족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귀족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와 있다. 혁명 후 계급과 신분이 없어진 프랑스사회에서 이 말은 국가의 도움으로 교육을 잘 받아 성공한 사람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도 가진 사람들은 베푸는 일을 사회적 의무로 생각한다.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인들이 한창 고통받고 있던 지난해 5월 미국 뉴욕 록펠러대 총장관저에는 경제위기 속에서 부자들이 어떻게 기부활동을 펼쳐 나갈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제가 됐다. 미국 갑부를 다투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록펠러 가문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 씨 등이 모인 이 회의에는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도 있었다. 10여 일 후 소로스 회장은 뉴욕 맨해튼의 한 자선모금 행사에 참석해 5000만 달러를 흔쾌히 기부했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영국을 위기에 빠뜨린 소로스 회장을 영국인들은 아직도 ‘세기의 투기꾼’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미국인은 그를 ‘세기의 자선가’로 부른다. 포브스가 세계에서 29번째 부자로 선정한 소로스 회장은 110억 달러 재산 가운데 각종 자선기금으로 60억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선을 하면 더 큰 행복을 느낄 것”이라는 ‘기부 황제’ 빌 게이츠의 말은 미국인들이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요시 하는지 잘 말해준다.

존경받는 인물 없는 ‘우리’

사회주류 대부분 자수성가… 지위 걸맞은 권위 행동 없어
선진국 진입에 맞는 국격 위해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 필요


○ 4대 의무조차 소홀한 한국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동아일보는 3, 4일 이틀 동안 대학교수 등 사회 각계각층의 전문가 14명에게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누구인지를 묻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3명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답했다. 안철수 KAIST 석좌교수나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전형필 선생,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이사장 등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거론됐지만 중복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는 “대체로 다른 사람을 많이 돕는 기업인 중에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같이 모두가 공감할 만한 존경받는 상류층이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거론됐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에 그동안 고귀한 신분(노블레스)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존경받는 상류층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상류층이 대부분 6·25전쟁 이후 밑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것. 이에 따라 사회적 책임을 지는 높은 위치에 올라와도 그에 걸맞은 권위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국방·근로·납세·교육 등 4대 의무를 충족한 다음 사회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지도층을 뜻하는데 한국의 상류층은 4대 의무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사회지도층이 비판을 피하려고 하거나 금기시하는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며 “문제 제기와 비판을 수용하는 문화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이사장
“기부는 영원한 투자” 300억 쾌척

○ 남한봉 유닉스코리아 대표
회사 사정 나쁠때도 기부는 계속



장학재단인 신양문화재단 정석규 이사장(81)은 ‘기부는 영원한 투자’라는 신념으로 기부를 생활화했다. 정 이사장은 1987년 첫 기부 이후 공익재단법인에 153억 원을 출연하는 등 그동안 기부한 금액을 모두 합치면 300억 원이 넘는다. 정작 정 이사장 자신은 20년도 더 된 빛바랜 양복을 입고 다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실천이 중요한데 많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천을 잘 못합니다. 인간은 부를 축적하고 상속하거나 호화롭게 살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죠. 기부에는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후두암 수술을 받은 뒤 말을 잘하지 못하는 정 이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 이사장은 중견기업인 태성고무화학의 창업주다. 활발한 경영활동을 하다가 2001년 회사를 매각하고 현재는 장학사업에만 매진하고 있다. 후두암과 위암 수술을 받아 건강이 한때 악화됐지만 기부활동은 계속했다. 그동안 신양 공학학술상을 비롯해 학술연구기금, 학술정보관 건립기금, 장학금 등 각종 사업에 자신의 돈을 아끼지 않아 서울대에 기부한 금액만 133억 원에 이른다. 정 이사장은 “기부 문화를 촉진하려면 세법상 혜택도 늘려주고 감독 기관의 까다로운 규제도 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한봉 유닉스코리아 대표(69)는 2008년 5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1억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쾌척했고 그 뒤로 다른 사회복지 단체에도 매월 일정액을 기부하고 있다. 남 대표는 1963년 9월 군복무 중 트럭이 50m 아래의 낭떠러지로 구르는 사고를 당한 뒤 하반신이 마비돼 줄곧 휠체어에 의지해 지냈다. 남 대표는 이후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생활한 덕분에 1979년 시작한 사업이 번창했고, 상황이 좋아지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됐다고 한다.

“가족들은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기부를 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좋은 본보기를 물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추복과 하복 양복 한 벌씩으로 1년을 지내고 오래도록 수선해 신은 구두의 앞코가 해질 정도로 검소한 남 대표는 “기부를 하면서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

익명으로 기부하는 사람도 많다. 선행을 알리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보는 유교적 가치 때문에 한국에는 ‘익명의 독지가’가 숱하다. 동국대에는 31년째 매 학기 학생 5, 6명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독지가가 있다. 초기에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이제 50대가 넘었다. 동국대 관계자는 “유명한 기업의 오너이지만 끝까지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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