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못찾는 ‘자유전공학부’

  • 입력 2009년 5월 4일 02시 55분


“전용건물도… 선배도… 뚜렷한 소속도 없어 불안해요”

법대-약대 학생모집 중단에 각 대학들 서둘러 과정 개설

“전공 정해도 소속 안바뀌어”입학 3개월째 갈수록 갈등

2009학년도 입시에서 상위권 대학들이 앞 다퉈 자유전공 과정을 만들었지만 대학 생활 두 달을 보낸 자유전공 신입생들 사이에는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학부제와 마찬가지로 2, 3학년이 되면 소속이 바뀌는 줄 알고 진학했는데 기대와 다르다는 불만, 전용 건물이 없어서 다른 학과에 더부살이하는 것 같다는 성토, 학교 행사나 동아리 활동에서 선배가 없어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하소연 등 이유도 다양하다.

고려대 자유전공 학생들은 지난달 대학 측에 “학년이 올라가면서 전공을 결정하면 소속을 해당 학과 또는 학부로 바꿀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신입생 모집 요강에 소속 변경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없다”며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지난해 다른 대학에 다니다 올해 고려대 자유전공 과정을 택한 한 신입생은 “학교 측에 입학 상담을 했을 당시에는 나중에 선택한 전공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해서 당연히 소속 학과도 달라지는 줄 알았다”며 “요즘 학생들은 부전공이니 복수전공이니 해서 전공을 몇 개씩 만드느라 공을 들이는데 우리만 두루뭉술한 전공으로 졸업하기에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연세대 자유전공학부 1학년 박모 씨는 중간고사를 치르면서 좌절감을 느꼈다. 다른 계열에 비해 필수과목이 적어 다른 학부의 교양과목을 무분별하게 신청한 것이 화근이었다. 박 씨는 “수강신청이나 서술형 시험이 모두 처음인 데다 공부 내용까지 광범위해서 죽을 맛이었다”며 “같은 과정을 경험한 선배가 조언을 해주거나 전담 교수님이 컨설팅을 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대학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신설에 따른 법대 신입생 모집 중단, 약대의 6년제 전환에 따른 약대 신입생 모집 중단을 만회하기 위해 성급하게 자유전공 과정을 개설한 데 따른 여파이기 때문이다. 상위권 수험생의 이탈을 막기 위해 소위 ‘리딩 학부’로 자유전공 과정을 만들었지만 커리큘럼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안내가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일상생활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다. 동아리나 학회 활동을 함께할 선배가 없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 대부분의 대학이 신입생이 없어진 법대 공간에 자유전공 과정 학생을 배치하다 보니 이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전공 과정 학생들은 학교 홈페이지에 ‘법학도서관에 자리를 잡으면 법대 선배들이 눈치를 준다’ ‘교수님들이 자꾸 로스쿨 얘기만 한다’는 등 다양한 불만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우리 대학 홈페이지 학과 안내에는 자유전공이 아예 없다’는 자조도 있다.

이런 갈등은 자연계열보다 인문계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자연계 자유전공 학생들은 대부분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이나 3학년 때 약대 진입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학부의 소속 전공 등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인문계 학생들은 로스쿨이나 경영전문대학원 등 딱 떨어지는 진로를 정하지 않는 이상 소속과 전공을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자유전공학부 대신 정책과학대학을 신설해 아예 로스쿨, 행정고시 등에 특화된 교육과정을 강조한 한양대 관계자는 “역사가 오래된 미국의 리버럴아츠칼리지 등과 달리 아직 우리나라의 자유전공은 모호한 측면이 있다”며 “각 대학이 더 선명한 교육 목표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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