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해동성국 발해

  • 입력 2008년 3월 31일 02시 57분


《발해 역사에 관한 연구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발해가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던 일본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발해사는 단순히 한국사의 일부라는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동성국 발해 中-러-日 왜 모두 ‘한국의 역사’ 부정하는 걸까

중국이 동북지역의 역사를 되찾겠다고 계획한 동북공정 이후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발해사의 귀속 문제이다. 이 논의는 크게 보아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로 보는 한국의 관점과, 말갈계 국가로 보는 중국의 관점이 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출신성분과 발해인의 종족 구성 문제와 맞물려 양국의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먼저 해동성국 발해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된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진국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698년 동모산 기슭에서 ‘후고구려’를 세웠다. 대중상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다. 699년 5월, 대중상이 죽자 태자였던 대조영이 그 뒤를 잇게 된다. 왕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대조영은 십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말갈 장수 걸사비우,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이해고의 당 정예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대조영은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부활을 선언하고 고구려 옛 영토 회복에 나서게 된다. 대진국의 본격적인 진출은 2대 광종 무황제 때 대장 장문휴가 등주 지방을 기습한 것에서 시작된다. 견디다 못한 당 현종은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내리며 평화 협정을 맺는다.

이후 발해는 발전을 거듭하여 문물이 크게 융성하였고 영토도 고구려의 전 영역과 지금의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 전성기의 1.5∼2배, 후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의 영역이다. 또한 발해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칭제건원)하고, 상제에 대한 천제(天祭)의식을 치르는 등 천자국임을 내외에 공표하고, 고구려의 부활을 내세웠다. 당 일본 신라 거란 등이 두려워하였고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해동성국으로 칭송받았다.

고구려의 국통을 이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발해는 9세기 후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세력을 키워 발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은 전형적인 정복 군주였다. 성장한 유목 민족은 국가를 유지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한족이 다스리는 중국을 공격했다. 또한 이들은 중국에 진출하면서 후방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를 공격하는데, 이것이 중국이 역사적 격변기를 지날 때마다 우리 민족이 대륙의 침략을 받은 이유이다. 92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마침내 발해 원정을 단행하고, 이듬해 정월 발해의 수도 상경이 함락된다.

중국이 발해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이 아닌 말갈족에서 귀화한 고구려인이다. 둘째, 발해의 영역 대부분이 지금의 중국의 영토 내에 있다. 셋째, 발해는 말갈족이 지배층의 일부와 피지배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해는 독립된 주권을 가진 국가라기보다는 약간의 자치권을 지닌 속국 혹은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발해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고 한다.

중국의 사학계에서는 발해 건국의 주체적 세력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 하여 고구려 유민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신당서』에서는 말갈이라 하여 고구려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이렇게 상반된 기록들은 후대에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발해 자신의 역사서가 거의 없고 중국 일본 신라에서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러한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발해의 영토가 중국에 있기 때문에 발해가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처럼, 러시아와 일본도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펴고 있다. 러시아가 발해사를 말갈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발해의 피지배계층 대부분이 말갈족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피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역사관, 즉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의 대부분이 말갈족이었기에 발해의 역사를 말갈족의 역사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분히 연해주 일대에 관하여 러시아의 연고를 주장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도 발해를 말갈족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만주 지방을 점령하면서 내세운 이론이다. 만주 지방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내세워 이 지역을 점령하고자 하는 속내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당연히 발해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발해가 중국의 영토에 있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따른 영토의 변화성을 설명한다. 즉 유구한 역사 속에서 모든 나라의 영토도 변화하기 마련인데, 단지 영토만으로 역사적 근거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발해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유들을 살펴보자.

첫째,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으로 고구려의 국통은 이은 나라이므로 우리나라의 역사이다. 대중상이 처음에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했듯이 발해는 고구려의 국통을 이은 나라다. ‘속일본기’는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라는 구절을 통해 발해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의하면 발해의 광종 무황제 대흠무가 일본에 국서를 전할 때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칭한 사실이 나온다. 또한 일본국이 발해에 보내는 회답서에도 발해를 ‘고려’라 하였으며 발해의 사신들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하였다. 발해의 문왕은 일본에서 사신이 오자 “이 땅은 고구려의 영토를 이었으며 부여의 유속을 이었으니 너희 일본은 우리를 옛 고구려를 대하듯 하라” 하며 호통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발해의 생활양식이 우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이유이다.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굴식 돌방무덤이라고 하는데,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 딸)묘를 보면 고구려와 양식이 같다. 발해의 미술은 고구려의 미술 사조와 같이 패기가 넘친다. 발해의 온돌은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으로, 발해의 유적에서 온돌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온돌은 중국에 없는 우리 고유의 것으로, 발해에서 온돌 유적이 발견된 이유를 중국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발해를 세우고 주축이 된 사람이 고구려인이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이 피지배층보다 수가 많았던 예는 드물다. 따라서 국가의 대다수를 말갈족이 이루었으니 발해를 말갈의 역사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고구려가 망하기 전까지는 이 같은 민족 구분의 문제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 굳이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발해에 대해서만 민족의 구분을 둘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해는 668년이고, 발해는 30년 후인 698년에 고구려가 있던 그 자리에서 세워졌다. 그런데도 발해의 민족은 우리의 민족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본래부터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때부터 말갈족들과 함께 고구려 영토 내에서 살았고, ‘발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박승렬 LC교육연구소 소장

심화학습

본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발해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주장을 분석하여 보고, 그 타당성에 관하여 토론하여 보자.

집요한 역사왜곡 ‘동북공정’의 노림수는

“발해는 물론 한강유역까지 중국영토” 주장

北붕괴 땐 그 영토까지 영유권 내세울 속셈

발해사 연구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자. 조선 후기에 발해에 대한 인식이 한껏 고무되면서 처음으로 실증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처음 기술함으로써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북쪽은 대씨가 차지했으니 곧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라 했다.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주로 영토에 관한 문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의 연구는 자연히 지리 고증으로 나타났고, 대표적인 인물로 정약용 한치윤 한진서 등이 있다. 19세기 초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발해사를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중국 등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다. 따라서 발해사 연구는 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2년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명제를 제시한 박시형의 논문이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이다. 하지만 북한의 발해 연구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에 이어졌다는 의미에만 너무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는 물론 고구려의 역사와 한강 유역까지의 영토를 아우르는 국가의 역사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지역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시작되었다.

처음 이를 시작한 목적은 우리나라가 통일 이후 간도와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북한이 망할 경우 북한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특이한 점이 있다. 한국이나 중국, 러시아에서는 발해사를 자기 역사의 일부로서 다루고 있지만, 일본은 발해사를 자신의 역사와 관련지어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구물이 많은 것은 일본의 대외관계사라는 측면과 함께 일제시대에 만주를 지배했던 경험이 중요한 이유이다.

발해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만주 침략과 연계되면서 주로 지리고증과 고고학적 연구에 중점을 두게 된다. 발해가 자체적인 역사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한 이유로 발해사에 관한 주변국의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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