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나쓰메 소세키 ‘그 후’

  • 입력 2007년 10월 2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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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만 강조하는 오늘의 시대

인간적 가치는 뒤로 한채

모두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그 후’의 사회는 어떻게 될까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위인은 아마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쯤 될 겁니다. 이 두 사람은 100원짜리 동전과 만 원짜리 지폐에 각각 새겨져 있어서 더욱 익숙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의 지폐에도 한국처럼 위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만 엔짜리 지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이 인물은 “일본이 아시아를 이끌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서양 세력과 대등한 관계에서 일본이 아시아를 정복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일본 근대화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1000엔짜리 지폐에는 국비로 영국 유학까지 다녀와서는 교수 자리를 뿌리치고 “양심에 따라 글을 쓰겠다”며 글쟁이가 된 나쓰메 소세키가 있습니다. 한국에 이광수나 염상섭 같은 일본 유학파 소설가가 있다면 일본에는 소세키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그 후’라는 소설은 1909년에 발표된 작품이니 소세키는 1910년대에 활동한 이광수나 1930년대의 대표작가인 염상섭의 선배작가가 되겠군요. ‘무정’과 ‘삼대’를 쓰기 전 이광수와 염상섭은 일본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당시 일본 최고 작가였던 소세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무정’이 계몽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한 채로 근대의 주제 의식과 문체를 추구했다면, ‘삼대’는 계몽주의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인간적 고민을 깊게 그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소세키의 ‘그 후’는 전근대적 소설 형식을 완전히 벗어던져버리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지독한 고민을 묘사하면서도 서양과는 다른, 일본만의 문체를 구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광수나 염상섭보다 한 수 위인지도 모릅니다. ‘무정’의 이형식이나 ‘삼대’의 덕기가 하는 고민이 덜 치열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소세키가 그려내고 있는 인물의 고민은 개인과 가족을 넘어, 아시아까지도 아우른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고민의 깊이와 양으로 따지자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깊이 생각하기 전에 ‘무엇에 대해 고민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다룰 ‘그 후’의 주인공 나가이 다이스케는 한국 일본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뼛속까지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 같아서 잘 관찰해보려고 합니다.

한국의 유길준은 고종황제의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 다녀와서 관료를 지내면서 “서양을 경계하되,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도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근대화된 강한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일본의 국비유학생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던 소세키는 이들과 달리 ‘과연 우리가 서양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일까’라는 돈 아까운(?) 고민을 합니다.

“일본은 어떻게든 선진국 대열에 끼려고 하고 있어. 모든 방면에 걸쳐서 깊이보다는 넓이를 확장해서 선진국처럼 벌려놓는 거야. 그러니 비참하지. 소와 경쟁하는 개구리처럼 이제 곧 배가 터지고 말 거야. 너무도 빡빡하게 짜여진 교육을 받고 눈 돌릴 틈도 없이 혹사당하니 모두 신경 쇠약에 걸렸어. 모두 바보가 됐어. 자신의 눈앞의 일만 생각할 수 있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피곤하니 어쩔 수 없겠지. 도덕적으로도 타락해가고 있어. 일본의 어디를 둘러봐도 모두 암흑이야.”

이 암흑의 기운은 세계 경제의 흐름에 힘껏 발맞춰가고 있는 21세기의 한국, 중국, 일본에도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도시 젊은이들의 눈빛이 똑같이 흐려졌습니다. 굶어 죽을 형편도 아니면서 오직 돈, 경쟁, 먹고 사는 일, 안정된 직업에만 골몰하고, 인간적 가치, 내면적 자아, 우리 사회의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은 보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청명한 아름다움을 가진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소세키가 묘사한 일본은 지금은 없습니다. 염상섭이 그렸던, 고민에 휩싸였던 조선도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물건과 달라서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패배하고 도태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변화를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변화에 휘말렸을 때 우리 자신이 사라져버리고 결국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면, 그리고 그 시대 변화에 몸을 내던지는 우리의 머릿속에 오직 옆 친구, 혹은 약한 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쁨과 풍족한 물질이 주는 행복만 있다면, 그래도 그 변화를 따라야 할 가치가 있는 걸까요? 나쓰메 소세키는 나가이 다이스케를 앞세워 2007년의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고민이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수봉 학림 필로소피 논술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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