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학교에 마을도서관을]전남 해남 송지초료 서정분교

  • 입력 2007년 10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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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송지초교 서정분교에서 6월 개관한 ‘서정마을도서관’은 학부모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아빠들은 서가를 만들고 엄마들은 벽화와 인테리어를 꾸몄다. 사진은 5월 도서관 만들기에 여념 없는 학부모들. 사진 제공 김웅일 씨
전남 해남군 송지초교 서정분교에서 6월 개관한 ‘서정마을도서관’은 학부모들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아빠들은 서가를 만들고 엄마들은 벽화와 인테리어를 꾸몄다. 사진은 5월 도서관 만들기에 여념 없는 학부모들. 사진 제공 김웅일 씨
《달마 스님이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영산(靈山) 달마산. 산 아래 남해에 비치는 햇살은 눈부시고 바위는 우뚝우뚝하다. 남도의 금강산이란 별칭이 아깝지 않다. 달마산 자락의 고찰 미황사가 숲의 별천지와 한껏 어우러진다. 그 아래. 전남 해남군 송지초교 서정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고즈넉한 자연의 품에 안겨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은 이 학교에서 올해 초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왜 ‘작은 것’의 가치를 몰라주는 걸까.” 혜원이(서정분교 4학년) 아빠 황찬율 씨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홍재 서정분교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최근 몇 년간 정부가 추진 중인 ‘학교도서관 현대화 사업’의 신청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했다. 학교도서관 리모델링 지원금 50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이 사업은 교실 한 개 반 이상의 공간을 도서관 자리로 확보한 학교만 신청할 수 있다. 교실도 부족한 서정분교 사정에 그 정도 공간은 무리였다. 》

○ 왜 ‘작은 것’의 가치 모르나

2003년 서정분교는 학생이 5명으로 줄어 폐교 위기에 처했다. 금세 사라질 것 같았던 작은 학교는 지금 여섯 학급 전교생 50명의 ‘분교 아닌 분교’로 살아났다. 분교치고는 학생 수가 많다. 다 학부모들의 힘 덕분이다.

윤산하(5학년) 한길이(4학년) 엄마 김해숙 씨의 회상이다. “젊은 부모들이 하나 둘 읍내로 도시로 떠났어요. 등교할 아이가 없으니 문 닫는 게 당연했지만 학교가 사라지면 지역공동체도 사라진다는 위기감이 번뜩 들었지요.”

학교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학생이다. 학부모들은 지인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갔다. 의외로 배짱이 맞는 학부모가 많았다. 기꺼이 작은 학교를 선택했다. 2004년부터 읍내에서 ‘전학 러시’가 이어졌다. 서정분교는 이제 ‘가고 싶은 학교’로 통한다. 수업이 끝나면 ‘품앗이학교’라 불리는 방과 후 수업이 이어진다. 풍물 공작 생태체험 전통놀이 등 ‘품앗이학교’의 선생님은 대부분 서정분교 학부모들이다.

○ 학부모들이 ‘뚝딱뚝딱’ 작은 도서관

학부모들은 ‘작은 학교’를 업그레이드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꿈을 채워 줄 책이 답이었다. 정부의 ‘학교도서관 현대화 사업’은 답이 되지 않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과 연이 닿았다. 지원해 주겠다는 책이 2500권. 하지만 도서관 자리가 없었다. 교실 하나 크기의 급식실이 학부모들의 눈에 띄었다. ‘우리 학교의 힘이 뭔가. 바로 우리 아닌가!’ 팔을 걷어붙였다.

“우리가 직접 도서관을 만들자.” 5월 한 달간 학부모 30여 명이 주말마다 모였다. 학부모들의 작업 동참률은 100%.

벽화와 인테리어는 (이)승영이(1학년) 엄마 조성심 씨가 맡았다. 어린이집 원장인 조 씨가 실력을 발휘했다. (양)시원이(5학년) 엄마 임혜경 씨는 도서관을 꾸밀 꽃과 나비 장식을 만들었다. 곤충과 별 모양의 모빌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아빠들이 모여 책꽂이도 만들었다. 벽도 페인트를 새로 칠하자 연두색으로 화사해졌다.

“리모델링 사업에 선정됐으면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웠겠죠. 하지만 ‘몸으로 때운 우리 도서관’이 훨씬 예쁘지 않나요?” 황 씨가 웃으며 말한다. 정 분교장이 거든다. “아이고, 학교는 막걸리 대접한 것밖에 없습니다. 껄껄.”

○ “학교 자치운영 모범 그 자체”

서정분교 학부모들은 통학버스를 마련하기 위해 바자를 열어 중고 버스 구입비 200만 원이 훌쩍 넘는 1000만 원을 벌었고 낡은 재래식 화장실을 새로 바꿀 정도로 저력이 있다. 그 ‘마법’이 학교마을도서관 만들기에도 발휘된 것이다.

책 2500권이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목록을 만들고 바코드를 붙이는 일에 학부모와 교사들이 매달렸다. 인근 공공도서관장을 초청해 바코드 목록 관리 방법도 배웠다.

2주간의 작업을 거쳐 6월 8일 문을 연 서정마을도서관은 100% 자율 운영된다. 어린이들이 책을 꺼내 바코드 스캐너에 긁으면 대출 완료. 책이 있던 책꽂이 자리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이름표를 끼운다. 반납할 때도 아이들이 그곳을 찾아 꽂아 넣기 때문에 책 정리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이름표만 있으면 누가 무슨 책을 반납하지 않았는지 ‘추적’하기도 쉽다.

오후 3시. 수업이 끝났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도서관에 전교생이 모여 시끌벅적하다. 양세란(5학년) 양이 자랑한다. “벌써 100권이나 읽었어요!”

1학년 담임 강신옥 교사는 “학부모의 관심이 부정적인 치맛바람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학교에선 자치 운영의 모범 그 자체”라고 말했다.

분교 통폐합을 유도하는 정책을 비판하는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크다. “무조건 분교를 업애려고 합니다. 작은 학교도 살려야 하는데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린 포기하지 않습니다. 먼 미래에도 알찬 학교로 남아 있을 겁니다.”

유쾌한 ‘치맛바람’ ‘바짓바람’이 만든 ‘작은 학교’의 ‘마을도서관’에서 불기 시작한 아이들의 독서바람이 달마산 무성한 숲으로 휘돌아 간다.

해남=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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