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의 신비 캐려면 극한 훈련 감수해야죠”

  • 입력 2007년 8월 10일 20시 04분


코멘트
"남극 바다의 수온은 0도입니다. 바다에 빠진 뒤 5분 안에 구조하지 않으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동료를 살리려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를 저으세요."

8일 오후 2시 소나기가 퍼붓는 인천 중구 영종도 해양경찰청 특공대 공기 부양정 부두.

제21차 남극 세종과학기지 월동연구대 대원 17명이 회색 전투복 차림으로 해경 특공대 정구소(48·경위) 전술팀장의 지시에 따라 노를 젓고 있었다.

고무보트 3대에 나눠 탄 대원들은 힘차게 노를 저었지만 강한 바닷바람과 1m가 넘는 파도 때문에 보트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가 5월에 공개 선발한 대원들은 내년 1월부터 2009년 2월까지 13개월 동안 세종과학기지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순간 방심하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야하는 극지라는 특성 때문에 전원 남성으로 구성됐다.

대원들이 남극으로 떠나기 전 '생존 훈련'을 받게 된 것은 2004년부터. 이전에는 남극 현지에서 자체 훈련을 해왔지만 2003년 12월 전재규 대원이 실종된 동료를 찾아 나섰다가 바다에 빠져 숨진 뒤 극지연구소는 해군과 해경 특공대에 훈련을 의뢰했다.

고무보트 운용술과 해상 생존법은 특히 대원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훈련이다. 남극에서 야외 조사를 할 때 주요 교통수단이 바로 고무보트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91년 창설 때부터 특공대를 이끌어 온 정 팀장이 직접 훈련을 맡았다.

파도를 헤치며 1㎞ 떨어진 갯벌에 가까스로 도착한 대원들은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에서 모두 어깨동무를 한 채 포복훈련을 시작했다.

이날 오전 특공대 훈련장에서 2시간 넘게 받은 혹독한 유격훈련 때문일까. 힘에 겨운 듯 일부 대원들의 입에선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얼굴은 흐르는 땀방울과 빗물, 진흙으로 뒤범벅이 됐다. 정 팀장은 훈련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기상 변화가 극심한 남극 바다에서는 어떤 사고가 닥칠지 모릅니다. 대원 모두가 한 몸이라는 생각으로 1년을 살아가야 합니다."

잠시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10분이나 됐을까. 갯벌 바닥에 주저앉은 대원들을 향해 정 팀장은 집합 호각을 불었다.

"이제 고무보트는 없습니다. 입고 있는 구명조끼에 의존해 수영해서 아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입수(入水)!"

대원들은 일제히 바다로 뛰어들었다. 헤엄을 치지 못하는 대원과 수영에 능숙한 대원들이 한조가 돼 서로 도우며 40분간 파도와 싸운 끝에 전원 부두에 도착했다.

이창주 특공대장(47·경정)은 "훈련 기간이 6일로 짧은 만큼 체력보다는 공동체 의식과 강한 정신력을 길러주기 위한 프로그램 위주로 훈련일정을 짰다"고 말했다.

이들은 왜 고생을 '사서'하며 동토(凍土)로 떠나려 하는 걸까. 사랑하는 가족과 1년 내내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다 휴가 한 번 없는 생활이다.

"남극은 무한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과학 실험실'입니다. 과학도로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홍명호 대원)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극한 환경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유태관 대원)

"한국을 대표해 남극에서 연구 활동을 한다면 그게 바로 '애국' 아니겠습니까? 집사람도 제가 자랑스럽답니다."(박교식 대원)

지원 동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대원들은 평소 꿈꿔왔던 '미지의 세계'를 밟게 된다는 기대감과 국가를 위해 일하게 된다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다.

자기 분야에서 5년 이상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대원들은 파견 기간 동안 4000만~5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다.

남극을 6차례나 다녀온 극지연구소의 베테랑 연구원인 홍종국(43) 대장은 "훈련이 고되긴 하지만 남극 파견에 앞서 진한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며 "대원들과 함께 남극의 기상과 지질을 연구해 지구 환경 변화의 원인을 추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응급처치훈련과 헬기 구조법을 익히고 11일 퇴소한 뒤 해양연구원에서 분야별 실무교육을 거쳐 내년 1월 4일경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남극 킹조지섬으로 떠난다.

하루 훈련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뒤 달콤한 휴식을 취하던 이날 오후 8시 경.

또다시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공동묘지가 있는 훈련장 주변 백운산을 밤새 한 명씩 오르는 야간 담력훈련이다. 후텁지근한 밤공기를 헤치고 17명의 대원들은 뛰어나갔다.

영하의 남극을 꿈꾸는 이들의 여름은 이렇게 뜨겁게 지나가고 있었다.

인천=황금천기자 kchwang@donga.com

●지금 남극은 세계 열강들의 전쟁터…미중일러 등 26개국 주도권 다툼

서울에서 1만7240㎞ 떨어진 남극대륙의 관문 킹조지 섬.

이 섬에 세워진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극지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제20차 월동대 대원들이 10일 남극의 최신 소식과 자연 경관 사진이 담긴 e메일을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1988년 건설된 세종과학기지는 내년에 20주년을 맞는다. 한국은 남극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킹조지 섬보다 위도가 높은 남극대륙 위에 제 2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 기후변화 연구의 중심지, 남극=남극은 전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지구 온난화 문제 연구의 최적지다. 다른 지역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15년 이상 극지 연구를 수행해온 세종기지의 이상훈 대장은 "지구 온난화에 남극 생태계가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세종기지 주변 마리안 소만의 빙벽이 녹아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주변 펭귄 군락지로 매년 돌아오는 펭귄 수가 10여년 사이 절반으로 준 것도 먹이인 크릴이 근처 해역에서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남극 대륙과 주변 섬에서 기지를 운영하고 있는 26개국의 주도권 경쟁은 최근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중국은 해발 4000m 산맥 정상부에 새로운 기지 건설을 추진 중이고, 독일은 기존 기지를 최첨단 시설로 바꾸고 있다. 미국은 해마다 3000억 원이 넘는 대규모 예산을 지출하며 남극 연구를 주도하고 있으며 상주 인원은 한국(17명)의 15배에 이르는 250명이다.

일본, 영국, 호주 등도 연간 500억~700억 원대의 예산을 투입해 극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낭만이 살아있는 남극생활=오지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각국 남극기지 대원들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연다.

지난달 27일에는 킹 조지 섬 주변 8개국 기지 대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남극 올림픽'이 열렸다. 한국팀은 단결력을 과시하며 칠레에 이어 종합 2위에 올랐다.

세종기지 대원들이 즐겨 먹는 음식은 삼겹살과 김치. 삼겹살과 김치 비축량만 수t에 이른다. 대원들은 또 무공해 만년빙을 갈아 간식으로 팥빙수를 만들어 먹곤 한다.

지구의 끝인 남극이지만 세상과 단절돼 있는 것은 아니다. 대원들은 인터넷 전화로 가족들과 통화하고 e메일도 교환한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위성방송을 통해 얻는다.

주방장을 맡고 있는 이상훈 대원은 "개인적으로는 남극에 오면서 문명에서 떨어지고 싶었는데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이 남극을 오지로 남겨두지 않았다"고 웃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나성엽기자 cpu@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