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때 요리 첫 맛… 11세 때 복어 손맛 낸 ‘꼬마 장금이’
○ 어른도 놀란 집념이 이룬 당찬 성공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재능은 비교적 늦게 발견됐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운 건 열 살이 되면서부터. 어머니 천 씨가 다니던 요리학원을 따라나섰다 떼를 쓰기 시작했다.
“모두들 진지하게 요리하는 모습이 신기했나 봐요. 한참 멍하니 바라보더니 ‘나도 요리사 할래’ 하더군요. 처음엔 장난이겠거니 하고 신경도 안 썼습니다.”
당시 학원을 운영하던 정계임(50) 원장도 마찬가지. 응석이나 받아 줄 요량으로 전화번호부만 한 요리책을 턱 안겼다. “그 책 다 보면 받아 주겠다고 했죠. 들기도 힘든 책을 낑낑 안고 가는 걸 보고 한참 웃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온 뒤 천 씨의 얼굴엔 웃음이 가셨다. 유정이는 요리책을 놓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꼼짝도 안 했다. “다 읽고 요리 배울 거야.”
본격적인 수업은 그때부터였다. 정 원장도 진지하게 유정이를 가르쳤다. “성인들도 헤매는 기술들도 척척 따라했어요. 물론 안 되는 것도 있죠. 그럼 될 때까지 합니다.”
문제는 오히려 이론이었다. 용어가 어려우니 이해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필기시험은?
“통째로 외웠어요. 관련 문제집과 책을 다 사서 그냥 달달 암기했죠.”(노 양)
2005년 5월에 양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말엔 일식을, 지난해 3월엔 복어와 한식 자격증을 땄다. 지난해 8월에 중식까지 따며 국가가 인정하는 조리자격증을 모두 획득했다.
○ 너 스스로 알아서 하고 책임도 져라
물론 식당을 하는 집안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을 터. 복어 시험의 경우 어머니와 함께 공부했으니 능률도 높았다. 하지만 부모는 “더 연습해” “더 공부해”란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지난해 초 유정이는 갑자기 요리가 싫다며 펑펑 울었다. 천 씨는 담담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책이랑 도구도 싹 치웠다. 사흘 뒤 유정이 스스로 책을 찾았다.
“어떤 일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하겠다면 가능한 한 지원하지만 오히려 무관심한 편입니다. 더 어릴 때부터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가르쳤어요.”
영어학원을 다니던 지난해의 일이다. 하루는 게으름을 피우며 가려 들지 않았다. 혼내거나 학원에 전화해 주거나? 천 씨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학원에 전화해 안 가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습니다. 게으름도 자신이 책임져야죠.”
학교도 학년 바뀔 때 말곤 찾아가지 않는다. 가끔 요리강좌를 들으러 오는 서울 길도 혼자서 다닌다. 해외 요리연수도 3, 4번 혼자서 참가했다. 유정이가 오히려 “다른 엄마들처럼 학교도 자주 오고 신경 써 주면 좋겠다”고 푸념한다.
“투덜거릴 때마다 이렇게 말해 줍니다. ‘아빠 엄마는 열심히 산다. 인간의 도리를 지킨다. 이것처럼 좋은 후원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요.”
○ 넓은 세상, 더 넓은 가능성
값진 성공을 이뤘지만 슬럼프도 찾아왔다. 올 5월 성인 요리사들과 겨루는 경남요리경연대회 일반부에 도전했다. 결과는 4등. 괜찮은 성과였지만 유정이는 오히려 충격을 먹었다.
“자신 있었거든요. 1, 2등은 할 줄 알았어요. 근데 다들 실력이 엄청났어요.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기분이 안 좋았어요.”
이쯤이면 다음은 뭔가 계기가 생기고 다시 맘 잡고 노력하지 않을까. 근데 유정이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천 씨도 말했다. “잠깐 그냥 놀라고 말았어요.”
유정이 입에서도 ‘애답지 않은’ 얘기가 나왔다. “아직 어리잖아요. 가능성도 많고 다른 분야에서 배울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다른 것도 다 해볼 거예요.”
부모도 말리지 않았다. 그림도 배우고 피아노도 쳤다. 전국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 공부도 곧잘 하는 편. 요즘엔 영어에 재미를 붙였다. 조리고등학교나 관련 대학도 쉽게 갈 수 있으련만. 유정이는 “일반 학교로 진학해 다양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유정이의 요리공부를 돌봐 준 적 있는 창신대 호텔조리제빵과의 주종찬(46) 교수. “유정인 열정과 자부심이 뛰어난 아이다. 하지만 너무 뛰어나다 보니 고집이 엿보이기도 한다. 요리는 험하고도 힘든 길이다. 길게 보고 가야 한다.”
유정이는 자기가 요리를 그만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좀 더 나은 요리사가 되는 길은 다양하다고 믿는다. 최근엔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TV에서 음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한의사 선생님을 봤어요. 보는 순간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막 들었어요. 요리란 게 그냥 먹고 멈추는 게 아니란 걸 알았죠. 무엇을 하든 요리에서 멀어질 생각은 없습니다.”
유정이는 가끔 혼자서 밥을 차려 먹는다. 그때도 모든 걸 동원해서 완벽하게 ‘한 상’을 차린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위해 요리할 때는 더더욱 공을 들인다. 정성이야말로 최고의 밥상 재료임을 요즘 유정이는 깨달아 가고 있다.
▼‘모방-창조능력’ 공간적성 상위 1% 들어▼
■ 노 양 잠재력 진단해 보니
“슬쩍 본 요리도 똑같이 만듭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대단해요. ‘깊은 맛’은 아직 무리겠지만…. 창작 요리도 예쁘고 깔끔합니다.”
다중지능(MI)이론에 기초한 잠재능력진단검사에서도 유정이의 장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공간적성 CP점수가 100이었다. CP는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학생 분포를 백분율(%)로 나타낸 점수로 유정이는 100명 중 1등이라는 것이다.
공간적성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혹은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다. 사물에 대한 균형감 기억능력 정보처리능력을 갖춰야 한다. 대교심리진단센터의 김영선 연구원은 “미술 건축 인테리어 등 시각 예술 분야에 대단한 소질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유정이는 또 평균 50점(편차 10)으로 환산한 ‘T점수’ 8개 항목에서 모두 60점 이상을 받았다. 평균치를 훨씬 웃돈다. 공간(74.91)을 포함해 자연친화(72.99) 언어(68.7) 자기성찰(68.04) 인간친화(66.98) 등 5개 항목이 상위 2% 이내다. 존경하는 인물로 서슴없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말한 이유를 알 만하다.
유정이의 관심 분야는 무얼까. 흥미 성향을 살피는 ‘진로진단’에서 인간친화 점수가 높았다. 사람을 상대하고 인간의 감정과 필요를 잘 이해하는 분야를 선호했다. 정치가 교사 사회복지사 등이 해당된다. 동식물을 다루고 환경을 보호하는 자연친화 성향도 높았다.
어머니 천 씨는 유정이가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자립심”을 갖도록 교육했다. 성과는 그대로 드러났다. 진로의식의 발달 수준을 보는 ‘진로성숙도’에서 확신성(61.46)이나 독립성(60.25)이 높았다. 김 연구원은 “진로를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의지와 미래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자립도가 매우 높았다”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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