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페서의 계절]<3>골병드는 학생들

  • 입력 2007년 3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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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력 대선주자의 정책자문역을 맡아 온 서울 모 사립대의 A 교수는 지난해 하반기 전공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대선주자 중 한 명을 골라 그 인물에 대한 홍보 방법을 기획하라”는 과제를 냈다. 눈치 빠른 일부 수강생은 A 교수가 돕고 있는 대선주자를 선택해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했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아 본 학생들은 상당수가 ‘아차’ 했다.》

그 대선주자를 다룬 학생들 대부분이 A학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은 “교수님 나름의 평가 기준이 있었겠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다른 대선주자를 다룬 것이 실수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우리 교수님은 ○○○ 편이야”

또 다른 서울의 모 사립대 B 교수는 지난해 2학기 강의 때 유력 대선주자 4명을 1 대 1 가상대결 구도로 상정해 놓고 학생들을 4개 팀으로 나눴다. 그리고 각자가 맡은 대선주자가 ‘어떤 선거전략을 썼을 때 승리할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냈다.

이 수업에서는 손수제작물(UCC)을 활용한 대대적인 홍보 전략을 내놓은 팀이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후 B 교수는 이 팀에 참여한 일부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상세한 아이디어를 구하는 등 자신이 돕고 있는 대선캠프에 필요한 홍보 전략 아이디어를 얻는 데 골몰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업 시간에 은근히 특정 대선주자나 정치인을 편드는 폴리페서 탓에 학생들은 학점을 따기 위해 눈치작전을 펴야 한다.

서울의 한 대학 C 교수도 2002년 대선 당시 ‘유명 정치인의 이미지 전략을 분석하라’는 과제를 내면서 “내가 정치인 K 씨와 친해서 종종 자문에 응하는데 K 씨에 대한 분석을 하는 팀이 평가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많은 학생이 C 교수가 언급한 정치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모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 대학원생은 “대선주자에게 정책 조언을 하는 교수 중에는 수업 때 자신이 제안한 정책을 선전하기도 한다”며 “이 때문에 선거활동 기간이 제한돼 있는 정치인들보다 폴리페서가 학생들에게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출마 땐 선거운동에 제자들 동원

선거에 직접 출마하는 일부 폴리페서 중에는 아예 자신의 선거운동에 제자들을 동원하는 일도 있다. 영남지역 한 사립대의 D 교수는 총선에 출마하면서 자신이 재직 중인 학과 학생 30여 명을 전담 선거 운동원으로 활용했다. 과 선배의 부탁 등으로 ‘차출’되다시피 한 이들은 조를 나눠 일부는 선거캠프 인근 여관에 숙식하며 선거운동을 했고, 나머지는 대학 캠퍼스 등에서 D 교수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해야 했다.

한 달가량 수업을 내팽개치고 길거리에서 선거운동을 도와야 했던 윤모 씨는 “이때 이후로 D 교수에 대해선 스승으로서의 존경심이 싹 사라졌다”며 씁쓸해 했다.

폴리페서들은 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정치인처럼 행동해 연구 분위기나 정상적인 사제관계를 크게 해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 모 사립대 E 교수의 조교로 일했던 송모 씨는 “모시던 교수님이 총선 공천에서 떨어진 뒤에도 외부 활동에 더 관심이 많아 무슨 행사만 있으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동정 보도를 부탁하러 다녔다”며 “어떤 때에는 내가 조교가 아니라 국회의원 보좌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마음은 정치판에…휴강 결강에 땜질 강의

영남지역의 또 다른 사립대 F 교수는 2004년 열린우리당의 지역 총선단장으로 활동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총선에 출마했다 떨어졌지만 정치에 대한 미련을 접지 않고 정당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F 교수는 한 번도 학교를 휴직한 적이 없고 강의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교수들에 비해 휴강이 잦고, 수업 준비도 부실한 편이어서 학생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F 교수가 있는 학과에 다니는 김모 군은 “F 교수를 쫓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될 정도는 아니지만 수업이 부실해 불만이 많은 편”이라며 “지난해 1학기에는 일주일에 강의 시간이 두 번 있는 전공과목을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반반씩 나누어 진행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G 교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여러 정부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G 교수는 위원회 활동으로 바쁜 학기에는 일주일에 두 번(2시간, 1시간) 강의하기로 돼 있는 전공과목을 2시간이 잡혀 있는 날만 강의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G 교수는 위원회 활동으로 한창 바빴던 2005년 1학기엔 시간강사와 격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신문방송학과에선 강의를 소홀히 한 폴리페서를 학생들이 쫓아낸 일도 있었다. 이 학과에 재직했던 한 교수는 연속으로 세 번이나 총선에 출마했고, 이에 따른 휴직과 대체강사 강의로 인해 학생들과 갈등을 빚어 왔다. 결국 그는 수업권 보장을 요구하며 교수 퇴진운동을 벌인 학생들로 인해 2005년 1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내 리포트 읽을 시간은 있으신지…▼

서울 K 사립대 총학생회 내달부터 ‘리포트 돌려받기’ 캠페인

“친구들은 담당 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이 매주 한 번밖에 안 돼 아쉬워합니다. 그렇게 바쁜 스케줄 속에서 저희가 한 학기에 겨우 두 번 제출하는 리포트는 얼마나 보시는지 궁금해요.”

서울의 K 사립대 총학생회는 다음 달부터 ‘리포트 돌려받기’ 캠페인을 벌인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교수가 평가한 뒤 다시 학생들에게 돌려주도록 하는 것. 외부 활동으로 바쁜 교수들의 관심을 학생들 쪽으로 되돌리겠다는 이유다.

총학생회장 김모(25) 씨는 “정치 활동을 하는 어느 교수님은 학교에서보다 TV 뉴스에서 더 자주 얼굴을 접할 정도”라며 “교수님들의 정치적 활동과 영향력이 대학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있지만 주된 역할은 학생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적지 않은 교수들이 정치 참여는 물론 시민단체 활동 등 바깥 일로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 김 씨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교수일수록 직접 상담도 받고 학업에 대한 조언도 듣고 싶다고 했다.

총학생회는 이 캠페인을 위해 책자를 발간하고 플래카드도 내걸어 홍보하는 동시에 교수협의회와도 협의할 예정이다. 캠페인에 동참한 교수들에게는 학기 말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행사를 마련할 계획.

총학생회의 이 같은 캠페인에 대해 학내에서는 “오죽하면 이런 발상까지 나왔겠느냐”는 반응과 함께 “교수의 권위와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 씨는 교수님을 학생들에게로 이끌기 위해서는 학생들 자체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 교수님’이라는 의식으로 연구실 문을 두드리다 보면 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열릴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교수님들이 정치 활동의 경험을 학내의 에너지로 발전시켰으면 한다”며 교수들의 노력으로 정계 인사와 학생들 간에 소통이 늘어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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