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인문계 대입 실전 논술

  • 입력 2007년 2월 6일 02시 57분


코멘트
■논제

사례 〈A〉 〈B〉 〈C〉는 ‘나와 타자의 만남’을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 제시문을 활용해 세 가지 만남의 성격을 설명하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1600자 ±100자)

※ 제시문은 이지논술 사이트에 있습니다.

■학생 글 - 김소연·전북 고창여자고등학교 3학년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을 수없이 반복한다. ①어린왕자 책에서는 만남을 길들인다고 표현했다. 한 여우를 길들이기 전까지는 많은 여우들 중에 그저 그런 존재인데 길들인 후에는 나에게 단 하나뿐인 특별한 여우가 되는 것이다.

②제시문 <다>에서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이름을 부름으로써 나에게 특별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와 이 시를 라디오라는 사물로 변형시킨 <사례C>도 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특별한 존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③제시문 <가>에서는 이렇게 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하였다.

<사례B> 영화에 나온 한 여주인공이 자신의 뚱뚱한 외모로 사람들로부터 갖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였다. 결국 이러한 생활을 버틸 수 없었던 주인공은 목숨을 건 전신성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선택하였다. 제시문 <가>에 나온 두 가지 관계의 성격 중 ‘나-그것’과 연관된다. ④‘그것’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재산, 집, 그 사람, 국가 등 3인칭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과 관계를 맺는 주체는‘나’의 일부일 뿐이요 나는 전체가 아니다. 외모 지상주의로 인해 외부조건인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만날 뿐 상대자를 있는 그 자체로 보질 않는다.

⑤제시문 <나>에서는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라 내가 아닌 사람. 즉, 타자성의 필요를 주장한다. 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타자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주인공 또한 관계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방법을 잘못 택했다. 제시문 <라>에서 공자가 말하길 군자는 조화는 하지만 뇌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불어 어울리기는 하지만 줏대 없이 남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타인의 잣대에 따라 나의 잣대를 맞추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사례A>에서는 연인이 서로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키스하고 있는 그림이다. ⑥보이는 외부적인 조건을 가리고 사람의 그 자체, 타자성을 인정하고 그 모습을 사랑하는 것은 제시문 <가>에 나온 관계의 성격에서 ‘나-너’의 관계와 연관된다. 만남에 있어서 주체적인 체험이자 인격적인 만남, 즉 주체 대 주체의 만남이다. 공간 속에서 다른 타자와 비교하는 공간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상대자와의 공간,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주의로 찌들어진 사회에서 이러한 만남은 쉽지 않다. 돈으로 무엇이든지 살 수 있고, 사람을 부릴 수도 있다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결국 이기주의를 불러왔다. 또한 정보화시대에 진입한 우리 세대는 작은 소규모 지역단위에서 벗어나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쉽게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지금 이러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만나고 길들이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희박하다. 이런 특별하고 소중한 만남에 있어서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고 보아야 한다. ⑦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첨삭 지도

역시 예술의 조건은 ‘해석의 다양성’이다. <사례A>에서 키스하는 연인의 얼굴을 ‘하얀 천’이 가리고 있다. 이것에 집중해 진정한 교감을 하지 못하는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랑은 ‘온 존재를 던지는 만남’인데 그림 속 연인은 소통의 장막(‘천’)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런 통설’ 그리고 소연 학생의 시각, 둘로 팽팽했다.

소연 학생은 <사례A>를 ‘나와 너의 관계(인격적 만남)’로 해석했다. 외부적 조건(외모)은 ‘천으로 가리고(보지 않고)’ 타자 그 자체 즉 ‘타자성(온 존재로서의 타자)’을 인정하는 만남을 표현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고로 <사례A>는 ‘주체 대 주체의 만남(나-너)’이다. 어느 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핏 보면 단순히 천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외면을 통한 사랑이 아닌 내면적인 모습을 중시하면서 교감을 나누는 것”이란 논증이다. 일반적 해석과는 다르다. 그래서 오히려 신선하다.

아울러 제시문 <나>로 <사례B>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제시문 <나>는 타인은 성격, 외모, 심리와 상관없이 단지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타자를 수용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연 학생도 타자는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라 내가 아닌 사람 즉 타자성으로 인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따돌렸던 영화 ‘미녀는 괴로워’ 속 인물들은 타자와 관계를 잘못 맺고 있다는 거다. 성형수술을 한 주인공도 줏대 없이 남을 따라가기 바빴다는 측면에서, 즉 제시문 <라>를 공자 식으로 비판하자면 ‘소인의 만남(나와 그것)’ 철학이란 지적도 탁월하다.

하지만 <사례 C>에 대한 분석은 오독이다. 제시문 <다>(김춘수 ‘꽃’)와 <사례 C>의 시인 모두 ‘나와 너’식 관계를 열망한다. 장정일 시인은 김춘수의 ‘꽃’을 단지 라디오로 바꾸었을 뿐이다. 장정일 시인이 단추를 눌러주고, 김춘수 시인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타자는 전파가 되고, 꽃이 된다는 것인데, 과연 시적화자들의 타자관이 같을까. <사례C>에서 마지막 연의 2행(‘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은 시적 화자가 일회적, 찰나적, 공리적 욕망에 의해 타자를 수단화하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을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나와 그것(라디오)’의 차등적 관계를 꿈꾼다. 고로 시의 주제는 같지만 시적화자의 욕망은 같지 않다고 분석해야 면도날 같은 논리력이다.

▷ ①은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란 책에서”로 써야 인용에 대한 구체성과 책에 대한 표기의 정확성을 가질 수 있다. ②는 비문이다. 논술문의 일차성격인 ‘뜻 전달’의 문제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이름을 부름으로써 나에게 특별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꽃’(제시문<다>)과 꽃을 라디오로 변형시킨 <사례C>도 같은 문제의식이다”로 고쳐야 한다. ③은 ”제시문<가>는 만남의 관계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로 좀 더 간단명료하게 쓸 수 있다. ④는 “재산, 집, 그 사람, 국가 등 3인칭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즉 ‘그것’과 관계를 맺는 주체는 ‘나’의 일부일 뿐 나의 ‘온 존재(전체)’가 아니다”로 고쳐야 의미가 통한다. ⑤는 “제시문<나>는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라 ‘내가 아닌 사람(타자성)’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로 고쳐야 표현 전달력이 제대로다. ⑥은 애매하다. 다음처럼 고쳐야 뜻이 통한다. “보이는 외부적인 조건을 매몰되지 말고 타인 그 자체 즉 타자성을 인정하고 그 온 존재를 사랑하자는 <사례A>는 제시문<가>의 ‘나-너’의 관계와 연관된다.”

▷ 논제랑 잘 어울리는 책 ‘어린 왕자’로 도입부를 연 게 쉽고도 깊이가 있어 좋다. 결말부를 다시 도입부와 연결(⑦)해 ‘전체주제 환기기능’을 해줘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맞춤법, 띄어쓰기가 틀린 곳이 몇 군데 있다. ‘옥의 티’다. 모두 수정했다. 다섯 단락을 중심내용에 따라 일곱 단락으로 나눴다. 띄어쓰기, 맞춤법 등은 표현력, 단락나누기는 구성력의 기본기다. 원래 글과 잘 비교해, 다음부턴 ‘악화(옥의 티)가 양화(좋은 내용)를 내쫓지(구축·驅逐)’ 말길 바란다.

■논제 분석

서울대 논술 유형이다. 쓸거리는 (1) 제시문을 활용해 타자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세 가지 사례들의 성격을 설명하고, (2)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는 것이다. 세 가지 사례와 각각의 제시문들이 일대 일의 대응관계에 있는 게 아니란 걸 유의해야 한다.

■제시문 분석

르네 마그리트 ‘연인’(사례A)은 남녀가 얼굴에 ‘천’을 뒤집어쓴 채 입맞춤하는 그림이다. 편지, 인터넷 메신저, 휴대전화 등 의사소통의 수단은 점점 넘쳐나지만 의외로 소통은 불완전해지는 현실의 부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례B>(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착하고 예쁜) 외모 권하는 사회’를 풍자한다. 전신성형에 성공한 주인공의 육체는 ‘이상적인 자기’이지만 삶과 정신은 ‘진짜 자기’가 아니라 ‘가짜 자기’다. 성형 전 외모(사람의 일부)나 성형 후의 외모(가짜자기)를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하고 사람에게 자기부정의 딜레마를 안기는 사회는 ‘나- 너’의 관계보다 ‘나-그것’의 관계가 더 횡행한다. <사례C>의 시적 화자는 누가 라디오 단추를 누르듯 자신을 눌러주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전파’(꽃)가 되고 싶다.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연의 2행(‘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은 그 만남의 세태가 일회적, 찰나적, 공리적임을 꼬집는다.

▷ <가> 태초에 관계가 있고,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뿌리(근원)는 두 가지 ‘관계(근원어)’로 뻗어난다. ‘나와 너’(Ich-Du/I-You)와 ‘나와 그것’(Ich-Es/I-It)이다. ‘나-너’는 나의 온 존재를 기울여 타자를 만나, 인격의 세계 즉 주체 대 주체의 만남이다. ‘나’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참된 만남이다. ‘여우-어린 왕자(생텍쥐페리)’가 서로를 ‘길들이는(관계맺음)’ 대화의 철학이다.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에서 너는 그것(사물, 수단,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타자는 비인격적, 차등적 존재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처럼,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주인공처럼 다른 사람의 톱니바퀴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 구약성경에서 과부, 고아, 빈자, 이방은 사회적 약자다.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들에 빗댄다. 타자를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타인은 성격, 외모, 재산 등 일부조건과 상관없이 단지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르다는 사실 즉 타자성으로 인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자를 사회적 약자처럼 우선 ‘나’가 타자(이웃)에 대한 책임을 보여줘야 한다는 연대의식의 강조다. 인간관계의 안정망인 만남의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공자·‘德不孤 必有隣’)’는 것이다.

<다> 소설 ‘변신’(카프카)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생활비를 버는 가장이다. 그런데 그가 벌레로 변하자 가족들은 ‘돈 버는 기계(그레고르)’와의 관계를 끊고자, ‘벌레’로 부른다. 그럼, 벌레로 변하기 전에도 그레고르는 가족들에게 ‘돈 버는 기계’가 진짜 이름이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시 ‘꽃’은 그레고르가 벌레이든 벌레가 아니든 ‘그레고르(인간으로서의 가족성원)’로 불리길, ‘나와 너’의 관계이길 바란다.

<라> 주체중심주의는 자기동일시의 맹목이다.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다. 소인은 타자들을 지배하고 수단화하려는 소유양식의 삶을 산다. 하지만 군자는 타자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어울리려고 하는 존재양식의 삶을 산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다. 공자는 ‘나와 그것’보나 ‘나와 너’의 만남을 강조한 ‘화(和)의 철학자’다.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실장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초빙교수

■다음 주 논제

[논제] 아래 제시문들은 ‘하늘(天)’에 대한 여러 입장을 담고 있다. 제시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천도(天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논술하시오.

※유의 사항: 제시문 <자>의 밑줄 친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 안에 포함시키시오.

(가) 제비에게 ‘하늘이 명하사(天命)’/내려가 상(商·殷의 시조 ‘설’을 지칭)을 낳게 하셨다/(…)옛날 하느님(제)께서 용맹스러운 탕왕께 명하셨다/사방에 각 임금들께 명하사/(…)‘받은 명(受命)’을 태만히 여기지 않아/(…)은나라가 받은 명은 모두 합당했다.

[시경(詩經) ‘현조’(玄鳥), 고등 ‘전통윤리’ 연계]

아, 하늘의 하느님(上帝)이 장남을 바꿔, 이 은나라 대국의 운명이 끝났구나!

[서경(書經), ‘소고(召誥)’]

(나)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아! 하느님(天) 나를 멸하시는구나! 하느님이 날 멸하시는구나.” 공자는 말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도 탓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여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갈 따름이다. 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늘(天)뿐이리라!”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세 가지를 두려워한다. 천명(天命·우주 최고 주재자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사회의 최고 통치자)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공자, ‘논어’]

(다) ‘하늘이 명한 것(天命)’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에도 두려워한다. 어두운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일보다 더 나타나는 것은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愼獨)’.

[중용(中庸), 고등 한문(금성, 지학)]

(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하여 ‘하늘’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늘’의 상을 받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해쳐 ‘하늘’의 뜻을 반함으로써 ‘하늘’의 벌을 받는 자들도 있다. 천자가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은 상을 줄 수 있고, 천자가 포악한 짓을 하면 하늘이 벌을 줄 수 있다. [묵자, ‘천지(天志)’]

(마) 어떤 사람이 물었다. “하늘은 움직이는가? 땅은 안정되어 있는가? 해와 달은 자리를 다투고 있는가?” “어떤 기계의 방아쇠 장치 같은 것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가? 혹은 저절로 움직여 스스로는 멈출 수 없는 것인가? 구름이 비가 되는가? 비가 구름이 되는가? 누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가?” 무함소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 내가 자네에게 말해 줌세, 하늘에는 육극과 오행이 있지. 제왕도 이에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거스르면 좋지 않네.”[장자, ‘천운(天運)’]

어떠한 작위도 하지 않지만 높은 것이 천도(天道)이고, 구체적인 작위를 해서 옭매는 것이 인도(人道)이다.[장자, ‘재유(在宥:사물을 구속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둠)’]

(바) 천(天)의 운행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왕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 농사에 힘쓰고 절약하면 하늘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잘 보양하고 제때에 움직이면 하늘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올바른 도를 닦아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하늘도 재난을 당하게 할 수 없다.[순자, ‘천론(天論)’]

(사) (…) 주 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가 오랑캐 사이에 가시어 살 때, 북쪽 오랑캐가 침범하므로 기산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天命)’입니다. 붉은 새가 글을 물고 (주 문왕의) 침실 문에 앉으니 거룩한 임금의 아들(주 무왕)이 혁명을 일으키려 하매 하느님이 주신 복을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뱀이 까치를 물어다가 큰 나뭇가지에 얹으니, 거룩한 임금의 자손인 태조가 장차 일어남에 있어 경사로운 징조를 먼저 보이신 것입니다. (무왕에게 은나라 주왕을 치라는) 말씀을 사뢰는 사람이 많되, (무왕이) 천명을 의심하므로 (신인이) 꿈에 (주왕을 치라고) 재촉하시다. (고려 말에 이씨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이가 많되, 천명을 모르시므로 나라를 세우지 않더니 하늘이 꿈으로 알리시도다.(…)

[정인지 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고등 ‘문학’(지학사, 금성 등) ]

(아) 동중서는 인간사의 정치와 자연법칙이 종류별로 같은 모습, 같은 서열을 가진 동형(同形)구조로 존재하며, 이로부터 그들은 상호간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배합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동중서와 그의 추종자들은 어떤 자연현상, 예를 들면 일식, 지진, 수재, 가뭄, 동식물의 이상 현상(가령 ‘목(木)에 변화가 생기고, 봄에 나무가 시들고 가을에 나무가 자라는’ 경우) 등을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했는데, 이것은 후세에도 거의 불변하는 법칙이 되었다. 동중서가 이러한 체계들을 만들어낸 것은, 주로 그것을 통해서 군주의 전제권력과 통치 질서를 확고히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동중서가 자연적 사물을 도덕화하고, 자연으로서의 천에 인격(의지나 명령, 감정)을 부여한 것은 일종의 신학적 관념론이다. 그러나 이 신학적 관념론의 기본정신은 사회질서(곧 왕조의 통치)와 자연법칙이 서로 연계되어 조화롭고 안정된 전체질서를 만드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쩌허우, 『중국고대사상사론』 ‘동중서와 천인우주론의 도식’]

(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일흔 명의 제자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척)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회쳐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 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天道)’라면, 이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사마천 『사기』 ‘백이숙제열전’]

釉맑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