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밖에 못먹는 식권 주고 “알아서 먹어라”

  • 입력 2007년 1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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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A시 “볶음밥은 반찬도 따로 없어요. 꽁꽁 언 밥을 데우면 느끼한 냄새가 나는데…. 아유, 아직도 그걸 상상하면 속이 메슥거려요.”

경기 A시에 사는 박모(15) 군은 지난해까지 집으로 배달됐던 결식아동용 ‘냉동도시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시 박 군에겐 똑같은 메뉴의 냉동도시락이 열흘 치씩 택배로 배달돼 왔다.

맛과 영양은 둘째 치고 전자레인지가 없어 해동도 어려웠고 냉장고도 작아 보관하는 것도 어려웠다.

A시는 2005년 12월 감사원의 감사를 받고도 상황을 개선하지 않다가 지난해 10월 지역 시민단체에 또다시 지적을 받고 도시락 제도를 없앤 뒤 식품교환권 제도를 도입했다.

# 경기 B시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빛이 화려했던 지난해 12월 31일, B시에 사는 신재윤(가명·12) 군은 9세 난 동생 현준(가명)이와 함께 동네 이마트를 돌며 점심 때 허기를 채웠다.

“시식코너에서 만두랑 고기랑 햄을 먹었어요. 홍초도 마시고…. 네 군데 정도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재윤이와 현준이는 결식아동이다. 5년 전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두 형제를 돌봐주는 건 아빠뿐이지만 아빠는 연말인 이날도 공사장 일을 나가 집엔 형제만 있었다.

방학인 요즘 두 아이는 학교 점심 급식을 먹을 수 없다. 동사무소에서는 지정된 식당에서 쓸 수 있는 식권을 주지만 가게들이 문을 닫는 공휴일엔 무용지물. 그럴 때 재윤이는 그냥 굶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다.》

005년 1월 제주 서귀포시에서 시작된 ‘부실 도시락’ 파문은 전북 군산시의 ‘건빵 도시락’으로까지 이어져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당시 정부는 파문 10여 일 만에 ‘아동급식 표준운영지침(안)’을 마련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후 방학 중 결식아동의 급식을 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상당수는 음식의 질이나 배달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식권이나 식품교환권, 음식 재료 공급 제도를 통해 결식아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현장을 찾았을 때 일부 지역에선 ‘급식’의 취지가 무색할 만큼 결식아동 지원 제도가 여전히 겉돌고 있었다. 정책의 목적은 사라지고 ‘욕만 얻어먹지 않으면 된다’는 지자체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 라면과 김밥밖에 먹을 수 없는 식권

방학이면 3000원짜리 식권을 받는 재윤이 형제.

아이들은 집 근처 분식집과 빵집 단 두 곳에서만 이 식권을 쓴다. 식권을 받은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아이들은 아직도 이 두 가게 외에 어느 식당에서 식권을 받아주는지 모른다.

“(지정 식당이 어딘지) 아무도 말을 해 주지 않았어요. 분식집도 친구들이 알려준 거예요. 시내엔 (밥을 주는) 식당이 있대요. 근데 우리 집에선 너무 멀어요.”

밥을 먹고 싶어도 3000원을 쥔 아이들이 동네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늘 라면, 김밥, 빵 정도다.

재윤이네 집에서 25분 정도 걸어가면 가장 가까운 지정 식당인 ‘털보식당’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싼 메뉴인 알밥과 해물뚝배기는 모두 5000원.

사장 이모 씨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3000원짜리 식권 1장만 받지만 솔직히 팔 때마다 손해 보는 셈”이라며 “이 동네에선 식권을 받으려는 식당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서럽다. 서울 Y구에 사는 김모(15) 군은 “중국집에 자장면을 시켜도 식권을 내는 경우엔 배달을 안 해 준다”며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 음식을 직접 갖고 온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2, 3일 치 식권을 모아 한꺼번에 쓴다.

지역아동 공부방 ‘좋은나무’를 운영하는 육근원 목사는 “담당 공무원이 현장 상황을 모르니 아이들은 1∼2주 만에 식권을 다 써버리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 인스턴트식품만 먹는 결식아동들

지역 내 지정 가게에서 음식 재료를 살 수 있는 식품교환권도 ‘영양가 있는 따뜻한 식사’를 제공한다는 정책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부모 없이 4남매끼리 살며 식품교환권을 받고 있는 강재연(가명·17) 양은 “어린 동생들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식품 위주로 구입하다 보니 늘 라면이나 냉동식품 같은 인스턴트 제품만 산다”며 “교환권으로 당장 먹고 싶은 과자나 탄산음료를 살 때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 재연이의 장바구니엔 라면, 소시지, 냉동피자, 캔참치, 탄산음료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음식 재료가 있어도 음식을 만들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겐 급식이나 도시락 지원 같은 ‘조리식’을 제공하는 게 원칙. 하지만 현실적으론 한 가지 방식이 일괄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연이의 오빠 재경(가명·21) 씨는 “일자리 때문에 몇 달 뒤면 지방으로 가는데 열 살인 막내 혼자 뭘 만들어 먹다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며 불안해했다.

그러나 모든 결식아동을 식품교환권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는 경기도의 한 지자체 공무원은 “도시락이 필요한 결식아동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대부분은 먹고 싶은 것을 골라 살 수 있는 식품교환권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 부족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정성’

부실한 급식 지원을 하는 지자체들은 “예산이 부족하다” “행정적인 한계가 있다” “어느 제도나 장단점이 있다”는 다양한 이유를 들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과연 그럴까. 똑같은 예산을 가지고도 제도의 취지를 잘 살리는 기초자치단체도 상당수 있다. 담당자들이 결식아동에게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한 곳과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한 곳의 결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은 쉽게 확인됐다.

경기 구리시는 지역사회 30여 개 봉사단체가 매일 차례로 돌아가며 구리사회복지관 조리실에 모여 결식아동들에게 줄 새로운 반찬과 밥을 만든다.

지역의 교회, 새마을 부녀회부터 라이온스클럽 등 다양한 주체들이 결식아동들의 밥을 위해 발 벗고 뛴다.

따뜻한 밥을 제공하기 위해 구리시는 아이들의 밥을 담을 200여 개의 보온도시락을 마련했고, 여기에 담긴 아이들의 식사는 구리시 택시운전사들로 구성된 교통봉사대 등 배분 봉사자들을 통해 아이들의 집까지 신속히 배달된다. 결식아동 급식 사업에 자원봉사단을 끌어들인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도시락 제작과 배달이 모두 자원봉사 인력으로 해결되다 보니 3500원의 결식아동 지원 비용은 고스란히 음식만을 위해 쓰인다. 도시락에는 쇠고기 장조림, 야채, 계란말이 등의 반찬이 골고루 담긴다.

복지관의 안옥경 가족복지팀장은 “도시락 지원 사업은 단순히 ‘밥’만 제공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가까운 곳에서 지역주민들이 아이들의 가정형편과 환경, 정서와 마음 상태까지 돌본다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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