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왕의 남자

  • 입력 2006년 9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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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혁재 기자
그래픽 이혁재 기자
《“좋냐?”(장생) “좋아.”(공길) “뭐가 그리 좋냐?”(장생) “그냥 다 좋아.”(공길) 장생과 공길이 주고받는 이 대사를 기억하세요? 오늘은 영화 ‘왕의 남자’를 다뤄볼게요. 배우 이준기를 일약 스타로 만든 이 영화, 혹시 여러분은 ‘동성애’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여러분이 진정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랑을 싹 틔우는 건, 욕망이 아니라 늘 외로움이니까요.》

[1] 스토리라인

조선시대 남사당패의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 이들은 양반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자신들의 삶을 박차고 나오려 합니다. 더 큰 놀이판을 찾아 한양으로 입성한 그들은 타고난 재주로 왕 연산(정진영)과 애첩인 장녹수(강성연)의 비틀린 애정행각을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여 장안의 화제가 됩니다. 왕의 측근인 내시 처선(장항선)은 이들 광대패를 궁 안으로 끌어들여 연산 앞에서 놀도록 합니다.

놀이패의 공연에 마음을 빼앗긴 연산은 공길에게 남다른 눈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공길을 마음속 깊이 아끼고 사랑하던 장생은 공길과 함께 궁을 뛰쳐나갈 채비를 합니다. 한편 질투심에 휩싸인 장녹수는 급기야 모종의 음모를 꾸며 공길을 음해합니다.

[2] 주제 및 키워드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사 하나를 꼽는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장생)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공길)

장생과 공길이 ‘장님놀이’를 하면서 주고받는 이 대화 속에는 주제가 고스란히 농축돼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기(here)’와 ‘거기(there)’는 다릅니다. 두 사람은 각기 자기가 선 곳을 ‘여기’로, 상대가 선 곳을 ‘저기’로 인식하기 때문에 서로를 찾아 헤매는 시늉을 하죠. 하지만 결국 어느 지점에선가 만나 반가운 포옹을 합니다. 장생과 공길이 ‘여기’와 ‘거기’의 경계를 넘어 일심동체가 됨을 상징하는 순간이죠.

하지만 여러분, 생각을 멈추지 마세요. ‘여기’와 ‘거기’를 뛰어넘어 교감을 나누는 사람들은 비단 장생과 공길만이 아닙니다. 늘 외로움에 사무쳐 살아온 왕 연산과 평생을 사회적 소수(광대)로 살아온 공길도 서로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죠. 또 연산과 그의 복잡한 심경을 십분 헤아리는 내시 처선도 마음으로 소통하는 관계입니다. 처선과 광대무리 역시 양반 중심 사회에서 꼭두각시로 살아야 할 자신들의 운명을 절감한다는 점에서 절망적인 동지의식을 공유하고 있죠.

이렇듯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 사회적 지위가 천차만별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동일시하면서 의지하고 소통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형국을 콕 집어 나타내는 사자성어는 뭘까요? 그렇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죠.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뜻이 통한다’는 뜻의 이심전심이야말로 이 영화의 키워드랍니다.

[3] 생각 넓히기

‘왕의 남자’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밋거리는 장생 일행이 펼치는 광대놀이입니다. 아찔한 외줄타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탈춤…. 남사당놀이는 그 자체가 볼거리인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심정과 운명을 암시하는 절묘한 상징이기도 하죠. 지금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놀이에 담긴 함의를 하나하나 알아볼까요?

㉠외줄타기=한 발짝만 헛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삶인지 모릅니다. 외줄타기는 어차피 제 홀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광대들, 아니 인간들의 존재적인 외로움을 상징하죠. 동시에 외줄은 장생과 공길을 이어주는 ‘운명의 선’이기도 합니다. 아찔한 외줄 위는 장생과 공길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광대놀이를 빙자해)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니까 말이죠.

㉡장님놀이=장생과 공길은 장님 흉내를 내면서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합니다. 이 놀이는 장생과 공길에겐 눈이 필요 없다는 점을 은연 중 각인시킵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의심없는 사랑과 교감을 나누는 관계라는 것이죠. 또한 장님놀이는 미래에 발생할 사건에 대한 잔인한 복선(伏線)이기도 합니다. 공길을 보호하려던 장생이 결국엔 대신 누명을 쓴 채 두 눈을 잃는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으니까요.

㉢아기놀이=왕 연산은 애첩 녹수의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놀이를 즐깁니다. 이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일종의 ‘자궁회귀(子宮回歸)’ 본능을 상징하고 있죠. 연산은 임금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심리적으론 ‘갓난아기’에 불과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던 쓰린 경험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연산. 그는 임금이었지만 사대부들이 공고히 쌓아 놓은 기득권의 벽에 사방이 가로막혀 늘 질식할 듯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상대적 약자’였던 것이죠. 연산과 광대무리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동병상련(同病相憐·어려운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하는 것도 양자 모두 자기 주도적인 삶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이기 때문입니다.

[4] 내 생각 말하기

장생과 공길은 자신들을 견고하게 감싸고 있던 ‘여기’와 ‘거기’라는 인식의 장막을 걷어냄으로써 일심동체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벌이는 이런 ‘융합’은 알고 보면 이 시대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과거는 세부 분야의 깊이와 특수성을 높이 사던 ‘전문성’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로 다른 분야간의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통합’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죠. 2008학년도부터는 대입논술시험도 서로 다른 과목을 오가는 ‘통합교과형’ 논술문제가 본격 출제되지 않습니까.

자,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가 벽을 허물고 융합하는 현상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제시하고 그런 현상에 대해 논리적인 평가를 내려보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공길은 손가락인형놀이를 하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아래를 보지 마. 줄 위는 반 허공이야.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반 허공….” 그렇습니다. 여러분 역시 지금 반 허공이나 다름없는 위태로운 외줄 위에 서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얼마나 좋을까요. 장생과 공길처럼 인생의 외줄을 함께 밟아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말입니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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