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다툼 극적인 타협

  • 입력 2006년 4월 10일 17시 12분


코멘트
400여 년을 끌어온 조선시대 명문 집안의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다툼)'이 두 문중 후손들의 극적인 타협으로 막을 내렸다.

10일 파평 윤 씨 대종회와 청송 심 씨 대종회에 따르면 두 문중은 지난해 8월 4일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尹瓘·?~1111) 묘(사적 제323호) 위쪽에 조성돼 있는 심지원(沈之源·1593~1662)의 묘(경기도 기념물 137호) 등 청송 심 씨 종중 묘 19기, 신도비 등을 파평 윤씨 문중이 제공하는 2500여 평으로 이장하기로 합의했다.

고려 시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로 상징되는 두 문중의 산송은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국가로부터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히는 이 일대 땅을 하사받은 뒤 부친묘를 윤관 장군 묘역 바로 위에 조성하자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파평 윤 씨 후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심지원은 윤관 장군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부친을 안장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63년 청송 심 씨 문중은 파평 윤 씨 문중이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는다는 이유로 심지원의 묘를 훼손했다며 윤 씨 가문을 처벌해달라고 당시 고양군수에게 요구하면서 분쟁이 본격화했다.

난처해진 고양군수는 이 문제를 중앙정부에 넘겼고, 영조까지 나서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윤관 장군 묘 위에 모셔진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고 윤 장군 묘도 그대로 받들라"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파평 윤 씨 문중 일부 인사가 "산소 뒷 부분을 누르고 있는 심지원 묘는 반드시 이장해야 한다"며 왕명에 반발하다 매를 맞고 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빚어지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윤관 장군 묘와 심지원의 묘는 3m 남짓 떨어져 있고 조선 말기에는 윤관 장군 묘역에 2m 높이의 돌담이 설치되면서 심 씨 문중 묘역은 앞이 보이지 않게 돼 얼마 전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파평 윤 씨 대종회 윤부현(77) 종보주간은 "조상을 잘 모시려는 후손의 마음이 오히려 조상들께 누가 된다고 판단해 양 집안이 한발씩 양보해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양 문중이 작성한 합의서에도 "오직 조상을 바로 섬기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상에는 자칫 곡해될 우려가 있어 대승적인 결정으로 400년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로 한다"며 "두 종중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선대 분묘도 공경하며 영구적으로 관리하도록 협조한다"고 명시됐다.

이장 대상지는 현 위치와 맞닿은 파평 윤 씨 소유 땅으로 5월 중 이장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파주=이동영기자 argu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