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인, 그들도 한국인입니다]<下>교육대책 마련 시급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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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시에 사는 흑인 혼혈인 강민정 양은 친구들이 놀리는 곱슬머리가 싫어 거울을 보지 않을 정도. 그는 “기회만 있다면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평택=윤완준 기자
경기 평택시에 사는 흑인 혼혈인 강민정 양은 친구들이 놀리는 곱슬머리가 싫어 거울을 보지 않을 정도. 그는 “기회만 있다면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평택=윤완준 기자
《“이런 걸 누가 입어. 다시 갖다 버려!” 이달 초 경기 평택시의 한 연립주택. 어머니 강옥자(46) 씨가 주워 온 옷을 강민정(18) 양이 못 입겠다고 승강이를 벌이는 소리가 현관문 밖까지 새어 나왔다. 강 씨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딸에게 변변한 옷 한 벌 사 줄 수 없는 형편이라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구했다. 강 양은 “한번 입어 보기라도 해라”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며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세금 1600만 원짜리 16평형 연립주택은 강 씨가 주워 온 빈 병과 옷가지, 우산으로 가득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강 씨 가족에게 빈 병과 옷가지들은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다.》

흑인 혼혈인인 강 양은 곱슬머리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 내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강 양이 자리를 비우면 같은 반 친구들은 강 양의 교과서와 신발에 ‘양배추’라고 써 놓거나 소지품을 쓰레기 소각장에 갖다 버리기도 했다. 강 양은 매일 아침 등교 전 30분씩 헤어스타일링기로 머리카락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려 야속하기만 했다.

강 양은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이 진학하는 중학교를 피해 버스로 20분이나 걸리는 다른 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괴롭힘’이 ‘왕따’로 바뀐 것뿐이었다.

고교 2학년인 강 양은 “기회만 있다면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차별은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학교가 정말 싫어요.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죽고 싶어요.”

아동복지재단인 펄벅재단 한국지부는 주한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 1만∼1만5000명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배우자와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코시안’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멸시는 혼혈인을 제도권 교육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밀려난 아이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마저 보듬어 주지 못하는 아이를 사회가 따뜻하게 안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펄벅재단이 2001년 혼혈인 184명의 학업 상태를 조사한 결과 9.4%가 초등학교, 17.5%가 중학교를 진학하지 않거나 중간에 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통계청이 조사한 한국인의 중학교 중퇴 비율 1.1%에 비하면 천양지차이다.

혼혈인을 둔 부모는 외모에서 비롯된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자녀를 외국인학교로 보내고 싶어 하지만 연간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비싼 학비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외국인학교에 입학하더라도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에게서 가난하다고 차별 받아 이중, 삼중의 정신적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한 외국인학교를 다니던 흑인 혼혈인 유모(16) 양은 한 달에 100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난해 11월 학교를 그만뒀다.

유 양은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가 1990년 걸프전 때 전사한 뒤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 유모 씨와 함께 살고 있다. 유 씨는 여관 청소, 식당일, 이삿짐 정리 등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외국인학교 학비를 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백인 혼혈인 박모(16) 양은 4년 전 따돌림 때문에 중학교를 자퇴했다. 박 양은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노동일을 하는 이웃 박모(64) 씨 부부 밑에서 자랐다. 박 양은 “공부를 계속해 선교사도 되고 싶고 수의사도 되고 싶지만 대학에서, 직장에서 또다시 따돌림을 받을까봐 두렵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코시안들도 학교생활 적응이 쉽지만은 않다.

코시안 이모(12·충북 청원군) 양은 최근 부쩍 말수가 줄었다. 필리핀인 어머니와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 한국어 발음이 어눌해지면서 학교에서 놀림을 받기 때문. 한국어에 서툰 어머니가 이 양의 공부를 거들어 줄 수도 없는 탓에 이 양의 학교 성적은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혼혈인의 학교생활 적응 실패는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혼혈인이 제도권 교육에서 밀려나면 실업 가능성이 높아지고, 인종 차가 정치적 경제적 계층 차로 연결되면 사회 갈등 폭발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펄벅재단 이지영(李芝英·여) 사회복지사는 “사회적 통합 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혼혈인의 고통도 커지고 사회에 대한 불신이 표출될 수밖에 없다”며 “그들에게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日-獨, 미군 혼혈아에 교육비 지원▼

흑인 혼혈인 정철우(가명·22) 씨. 그는 중학교 때 또래들의 놀림을 견디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받아 주는 직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유흥업소를 전전하고 있다. ‘따돌림→학업 포기→구직난→가난’이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혼혈인학교 설립 등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한 혼혈인 지원단체 관계자는 “혼혈인학교를 바라는 혼혈아가 많다”며 “정부가 주한 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에게 양육비와 교육비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펄벅재단 이경균(李璟均) 대표는 “혼혈아가 학교 교육을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유치원 단계에서부터 다른 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등의 교육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비혼혈아가 혼혈아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마련해야 혼혈인도 비혼혈인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는 미군과 일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다니는 별도의 학교를 세워 정부가 학비 전액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도 미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에 대해서는 18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와 교육비 전액을 독일과 미국 정부가 절반씩 부담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동남아시아인과 결혼한 한국인이 4000여 명에 이르러 코시안이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도시 지역보다는 농어촌 지역의 혼혈인 정책이 더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배재대 미디어정보사회학과 이혜경(李惠景) 교수는 “농어촌 지역 동남아시아 여성을 지역 학교의 영어 강사로 활용하면서 코시안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이들이 한국 사회를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외로워하지 마, 도우미 맺어줄게”▼

전북도교육청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난해 11월 지역 내 혼혈인 초등학생의 학습생활 지도를 위한 전담 팀을 만들어 올해 1학기부터 지원 활동에 들어간다.

전북도교육청은 혼혈인 학생 전담 팀에서 일할 현직 장학사와 교사, 영어 베트남어 전공자 등을 최근 선발했다.

이들은 올해 3월 입학하게 될 혼혈인 학생 가정에 보낼 입학 안내서를 혼혈인 부모들의 해당 국가 언어로 만들어 놓았다.

전담 팀은 학기 중 혼혈인 학생 가정을 방문해 상담 활동을 벌이고 혼혈인 학생들에게 같은 반 친구 3, 4명과 도우미 관계를 맺게 해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할 계획이다.

전담 팀은 또 혼혈인 학생들의 외국인 부모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도 세워 놓고 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 동남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소개해 혼혈인 학생 가정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전북도에는 초등학교 420곳에 521명의 혼혈인 학생이 있으며 대부분이 코시안이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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