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안치운/옛길을 걷노라면…

  • 입력 2004년 6월 14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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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재미는 참 많다. 그 가운데 사람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커다란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여행은 길에서 ‘그’와 ‘내’가 우연히 만나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애를 써서 사람을 피하려고 여행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여행은 본디 툭 터진 곳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여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여행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곳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이왕 여행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여행도 계절마다 맛이 다르다. 여름의 여행은 가볍고 시린 봄 여행의 분위기와 다르다. 봄 여행보다 먼 곳을 상정하기도 한다. 봄 여행은 이제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겸손과 기대를 동시에 안겨준다면, 여름 여행은 느낌과 감회가 새롭다. 여름 길을 걷다보면 몸이 땀을 내며 말한다. 세상 만물이 다 이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계절처럼 여름은 늦게 오는 법이 없다. 여름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약속시간보다 훨씬 먼저 달려온다.

나는 이맘때가 되면 강원 정선을 그리워한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진부, 하진부, 오대천, 숙암리…. 여름은 정선을 가장 그리워할 때이다. 정선으로 가는 내 몸은 들떠 있기 마련이고, 오대천 골짜기마다 돌부리가 나 있는 옛길을 더듬는 오래된 내 승용차는 지칠 수밖에 없다. 승용차에는 바퀴마다 충격을 줄이기 위한 스프링, 즉 ‘쇼크 업소버’라는 것이 달려 있는데, 네 바퀴 모두 스프링이 깨져 기름이 새어나온 적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꿈속 같은 정선이 좋다. 진부에서 오대천을 따라 정선으로 내려오는 길은 언제 가도 참 좋고 아름답다. 나는 이 길이 포장되기 전부터 배낭을 메고 다녔는데, 길의 수려함은 나라 안에 있는 길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빼어나다. 지도에 405번 국도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 길은 최근에 길 번호가 바뀐 모양이다. 그곳에 단임골이 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막동리와 숙암리 중간에서 대기교를 지나 봉산리쪽으로 나 있는 깊고 깊은 골짜기다.

405번 국도가 있기 전에는 단임골 사이로 옛길이 있었다. 진부에서 정선으로 가로질러 오는 길이었는데, 새터라는 뜻을 지닌 신기리에서 오대천을 건너고 재를 넘어 숙암리로 다다를 수 있었던 유서 깊은 옛길이다. 단임골에는 화전민들을 위한 분교가 폐교된 채로 있다.

옛날 사람들은 진부에서 정선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갈 때 벼랑길을 내려가고 숲을 헤치며 이 길을 걸었고, 여량이나 강릉으로 가려 했을 때는 봉산재를 넘어 송천을 따라 걸었다. 오대천이나 송천을 끼고 도는 길의 풍경은 수달래가 산에 수를 놓는 봄과 여름에 절정을 이룬다. 다행히 봉산재와 봉산리에서 자개골로 떨어지는 길과 송천을 따라 구절리에서 횡계쪽으로 나 있는 길은 아직 옛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에는 사륜구동의 힘 좋은 차를 탄 이들이 오프로드 트레킹이라고 하면서 이 길을 종주하곤 하는데, 걷고 싶은 이들이 이 길을 따라 가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단임골 골짜기에는 도시에서 삶의 정나미를 통째로 잃어버린 이들이 찾아와서 살고 있다. 그들은 귀중하고 소중한 기쁨은 모두 느리게 오고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삶과 길이 그곳에 있다.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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