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교수 일제시대 文人 글쓰기 형태 3가지로 분류

  • 입력 2003년 9월 8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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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조선어교육 폐지 및 일본어 상용, 1940년 2월 창씨개명, 같은 해 8월 동아 조선일보 폐간, 41년 4월 문예지 ‘문장’ ‘인문평론’ 폐간, 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강점 말기는 조선어의 암흑기였다.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하라고 강요받은 당대 문인들 가운데 일부는 절필했고 일부는 일본어로만 글을 썼다. 어떤 이는 일어든 조선어로든 체제에 협력하는 글을 썼고 어떤 이는 일어로 쓰되 체제와 무관한 글을 썼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일제강점 말기 조선 문인들의 이 같은 이중어(二重語) 글쓰기 태도를 분석해 연구서 ‘일제말기 한국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서울대출판부)을 내놓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특히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혼(魂)의 과제’라고까지 부르며 주도했던 창씨개명이 작가들의 ‘이중어 글쓰기’ 태도를 구별하는 데 주요한 잣대가 된다.

김 교수는 이중어 글쓰기의 행태를 3개 ‘형식’으로 분석했다.

제1형식인 유진오 이효석 김사량 등은 일본어를 단지 도구로만 여겼다. 언어를 ‘혼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창씨개명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이들은 ‘작가는 단지 자기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쓰면 그만’이라는 임화의 ‘기술원론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유진오와 이효석은 어떤 언어로든 열심히 문학활동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김사량은 “일본어로 슬픔이나 욕지거리 같은 조선의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조선의 문화를 일본 동양 및 세계에 알린다”는 동기 때문에 일본어로 창작했다.

이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지점에 제2형식의 이광수가 있다. 그는 창씨개명이 발표된 직후인 40년 2월 제일 먼저 참여했고 가장 철저히 반응했다. 춘원이 일본식 이름(香山光郞)과 한국어 본명으로 발표한 글은 각기 ‘혼’이 달랐다. 일본식 이름으로 쓴 글에서는 ‘내선일체의 합리화 및 선동의 나팔수’ 역할을 했지만 같은 시기 본명으로 쓴 글에서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낫다는 자존심과 식민지 지식인의 굴욕감을 드러냈다.

한편 김 교수는 제1형식의 논리적 단순성과 제2형식의 복잡한 심리가 뒤엉켜 나타나는 제3형식군의 작가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최재서를 꼽았다. 그는 창씨개명제가 시작된 지 3년 후에야 이름을 바꿨지만 그 이전에도 본명으로 ‘내선일체’를 열렬히 외치는 글을 썼다. 김 교수는 “1944년 강제적인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뒤늦게 자기모순이 격화돼 창씨개명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재서는 또 본명이 아닌 필명(석경우·石耕牛)을 변형해 일본식 이름(石田耕造)을 지었다.

김 교수는 “친일문학 여부를 따지기 전에 그 내용을 분석해야 한다”며 “일본어 뉘앙스 해독이 가능한 내 세대의 연구자가 해야 할 봉사라는 심정으로 집필했다”고 덧붙였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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