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서울대 교수 정년퇴임 "왕조교체 한국사 최대이벤트"

  • 입력 2003년 5월 22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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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활동에 눈 돌리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해온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김미옥기자
사회 활동에 눈 돌리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해온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김미옥기자
《국사학계의 4·19세대를 대표하는 한영우(韓永愚·65) 서울대 교수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퇴임한다. 한 교수가 1997년에 펴낸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1950년대 이병도(李丙燾)의 ‘국사대관’, 70년대 이기백(李基白)의 ‘한국사신론’과 한우근(韓우劤)의 ‘한국통사’, 80년대 후반 변태섭(邊太燮)의 ‘한국사통론’을 잇는 4·19세대 역사학자의 대표적 통사로 꼽히고 있다.》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기존 통사와 달리 현대사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 노무현 정부는 공공연하게 김구(金九)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李承晩)과 김구를 평가한다면?

“역사가들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 대해서는 잘 쓰지 않지만 나는 역사가 현재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당대를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구를 과도하게 평가하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부가 되고 만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다. 현 대한민국의 출범과 성장을 주류로 봐야 한다. 다만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김구를 주목할 때가 됐다.”

―4·3사건은 어떻게 평가하나.

“4·3사건은 이미 이승만 정권 당시 사법부의 재판에 의해 과잉 진압이 인정된 사건으로 시비는 그때 판가름난 것이나 다름없다.”

―4· 19세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서울대 사학과 4학년 시절 4·19를 맞았다. 4·19세대의 핵심은 당시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시위를 주도한 대학 3, 4학년을 지칭한다. 우리와 한 해 선배와는 1년차라도 큰 차이가 난다. 우리는 장면 정권시절의 무법천지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사에서 사상적으로 그때만큼 자유로운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나세르, 카스트로, 은크루마 등 제3세계의 영웅과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 북한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다. 대학에 학문서클이 처음 생겼고 나도 대학원 시절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廈), 국문학과 조동일(趙東一) 등과 함께 공부했다. 지금도 그때를 회고하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괴테시대의 질풍노도 운동이란 게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새로운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었고 그전까지는 ‘엽전’으로 무시해 왔던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1960년대 들어 식민사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한 것은 이기백과 김용섭(金容燮) 교수였고 구체적 연구로서 앞장선 것은 4·19세대 대학원생이었는데 그 중심에 한 교수가 있었다. 그는 정도전(鄭道傳)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KBS TV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정도전의 긍정적 모습을 최초로 복원한 사람이 그였다.

―한국 역사의 제1대 사건을 꼽는다면?

“왕조교체가 가장 큰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삼국에서 통일신라로, 고려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된 것은 우발적인 변화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요구된 총체적 변화를 가져온 축으로 봐야 한다. 조선 건국이념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그러나 유물사관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를 중세사회로 보고 왕조의 교체를 무시한다. 이토록 긴 세월의 사회발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정체사관이고 허무주의다.”

―90년대 후반 의궤(儀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본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미술부장을 했고, 한때 미대에 가려는 생각도 했다. 92년 규장각 관장으로 부임했을 때 의궤가 눈에 띄었다. 그 전의 관장들은 눈여겨보지 않은 것이었는데 내가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모른다. 내 손으로 직접 흑백 판화로 된 의궤에 채색 작업을 했다. 정밀한 고증이 필요하지만 전문 화가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었다. 6개월간 침식을 잊고 색칠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 안으로 ‘다시 찾는 우리역사’를 전면적으로 손볼 계획이다. 지금까지 16쇄를 찍는 동안 부분적인 수정은 해 왔지만 전체적으로 손보지는 못했다.”

―어떤 점을 손볼 생각인가.

“조선 후기 ‘민국(民國)’사상의 발전과정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계획이다. 영정조 시대부터 민본(民本)의 개념과는 다른 민국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왕이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이 아니라 궁 밖으로 행차해 격쟁(擊錚·징을 울리며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을 통해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조선 전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변화다. 규장각에는 격쟁의 내용을 기록한 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격쟁은 왕이 양반을 넘어 민에게 다가가려는 많은 변화의 일례에 불과하다. 조선은 당시 ‘백성을 위하여(for the people)’의 단계에서 한 발 나가 ‘백성의(of the people)’의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단지 ‘백성에 의한(by the people)’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지만 여기서 말하는 민국은 서양식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그때는 대한제국이 망한 지 겨우 9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조선 후기의 민국 개념이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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