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효종/‘法治 공동체’의 위기

  • 입력 2003년 5월 19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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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광주 운정동 국립 5·18묘지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학생들이 벌인 시위와 집단행동은 정말 유감이다.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도 한총련은 변했다고 강변해왔고 또 변신할 힘이 있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행사장 정문에서 대통령 일행을 막아 행사를 20분가량 지연시킨 이번 행동을 보면, 그러한 주장에서 ‘야누스적 얼굴’을 읽을 수 있을 뿐 신뢰를 갖기 힘들다. 혹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그들의 행동에서 ‘다중인격’을 확인할 뿐이다. 정말 변신했다면 의사 표시를 하는 데도 분별력이 있어야 했는데…. 그 자리는 5·18 영령들을 위로하는 엄숙한 자리였다. 자신들의 소신을 표출할 필요를 느꼈다고 해도 기념일을 이용해 초법자처럼 행동하기 전 행동의 결과와 무게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성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 한총련 ‘행동의 결과’ 생각해야 ▼

한총련은 노무현 대통령의 ‘친미 굴욕 외교’에 격앙되어 그처럼 격렬한 시위를 했다고 하나, ‘굴욕 외교’란 표현이 현 한국사회 다수 구성원들의 의견과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다수 의견만이 표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외곬의 의견과 가치관이라도 공론화의 기회는 허용되어야 한다. 설사 ‘사오정’과 같은 의사 표시라도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악마의 대변인’ 역을 수행함으로써 공론의 질과 품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의사 표시를 밀어붙이기식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해선 안 된다. 토론 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의 게임 규칙에 걸맞게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독선과 아집으로 가득 찬 근본주의자처럼 물불 안 가리고 행동한다면 민주적 공론의 참여자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셈이다. 한총련이 합법화를 염원해왔고, 이것이 논란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행동으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사실 노 대통령은 검사들과 공개토론을 했을 정도로 토론을 좋아한다. 한총련이 대미외교에 대해 불만이 크다면 노 대통령에 대해 당당하게 공개토론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번 방미가 ‘굴욕 외교’인지 아니면 국익을 위한 ‘동맹 외교’인지의 문제가 가늠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막무가내로 물리적으로 행사를 막고 나서는 모습에서 “그들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또 이번 한총련 사태는 민주국가의 유연성보다 법치국가의 허약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법정기념일로 지정되고 처음 열린 이번 5·18 기념식에 후문을 통해 입·퇴장하는 대통령을 보고 누가 민주사회의 인내심 있는 대통령이라고 할 것인가. 허약한 대통령에 불과할 뿐이다. 과연 민주사회를 담보할 법과 질서는 있는가.

우리는 물론 정치권력이 ‘바람’처럼 불면 국민은 ‘풀잎’처럼 눕는 경향을 보이는 강압적인 정부, 혹은 적법하고 정당한 의사 표시라도 원천 봉쇄하는 억압적인 정부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대통령, 또한 법의 권위에 의해 보호받는 대통령을 보는 것이 진정한 소망이다. 대미외교에 나섰던 노 대통령은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끌어올렸던 시시포스처럼 피곤한 몸으로 돌아왔다. 국익을 위해 소신과 철학을 꺾었다는 식의 논란까지 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대통령의 국익을 위한 결단과 노고를 보호할 수 없는 공권력이라면, 공권력의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근본주의적 의사표시’는 곤란 ▼

이번 한총련 사태와 그것을 막지 못한 경찰은 공권력과 법치국가의 나약함을 보여주었을지언정 민주주의 공고화 현상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수많은 불법시위가 공권력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던 물류대란이 끝난 게 엊그제다. 대학생들까지 불법시위에 가담해 무정부사태를 방불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우리 공동체는 위기에 처한 셈이다. 한총련의 불법시위에 ‘갈대’처럼 휘둘리는 참여정부, 또 법과 질서가 실종되기 직전인 우리 정치공동체에 과연 활로는 있는가.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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