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열풍의 허와 실]②한국인 영어실력의 현주소

  • 입력 2002년 2월 18일 18시 46분


《중소 제조업체 사장인 A씨는 지난해 신입사원 중에 토익 성적이 980점인 사원을 발견하고 매우 흐뭇해 했다. 인사 담당자는 “드디어 우리 회사에도 영어 잘하는 사원이 들어왔다”며 자랑했다. 그래서 이 사원에게 팬시용품 수출 업무를 맡겼지만 국제전화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3개월만에 다시 일반 영업부서에 배치했다. A씨는 “토익 성적이 좋다고 해서 큰 기대를 했는데 영어 구사능력이 신통치 않았다”며 “제대로 영어하는 사람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유아에서부터 초중고교생 대학생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영어공부에 엄청난시간과 돈을 들이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노력에 비해서 크게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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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가 본 한국인의 영어

영어를 가르치는 초중교고의 영어교사부터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지 못해 회화보다는 읽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교수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또 회사 입사나 승진 등 각 분야에서 영어능력이 강조되면서 토익 토플 등 영어능력 공인성적을 요구해 영어공부가 ‘점수 따기’에 치우치면서 영어교육을 왜곡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국가별 영어 수준을 비교할 때 토플이나 토익 성적이 인용되고 있지만 나라별로 응시자 수나 응시 형태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통계 자체만으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토플 평균 성적은 2000년 현재 677점 만점에 533점. 노르웨이(619점) 핀란드(591점) 독일(584점) 프랑스(557점) 등 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높다. 아시아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인 인도(581점) 필리핀(566점)이 높고 중국(559점) 파키스탄(541점)베트남(530점) 인도네시아(525점) 대만(515점) 북한(509점) 일본(504점) 등의 순이다.

신현옥 한미교육위원회 부단장은 “한국은 마구잡이로 시험을 보는 데 비해 응시료(110달러)가 큰 부담이 되는 중국 등에서는 준비된 학생만 응시해 성적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익 토플 성적이 높더라도 읽기 쓰기 듣기 등 영어 능력을 골고루 갖추기 힘들어 성적 자체만으로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토익은 시험 형식 등이 비교적 간단해 요령을 익히고 시험을 반복해서 보면 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학원가의 토익 특강반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대학생들은 영어 공부보다는 답을 골라내는 훈련에 더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토익 응시자 98만여명의 평균 성적은 990점 만점에 558.7점이고 이중 4회 이상 응시한 사람이 전체의 39.1%나 됐다. 초중고생은 4만4000여명(4.5%), 대학생은 47만여명(48.5%)이나 된다. 1회 응시자의 평균 성적은 481점, 2회 533점, 3회 563점, 4회 이상 응시자는 622점으로 시험을 치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수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K대 3학년 L씨(23)는 “요즘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토익 공부에 매달리기 때문에 문제만 보면 답을 찍을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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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학원 강사는 “토익은 시간관리 요령, 문형 익히기 등을 연습하면 100점 이상은 쉽게 올릴 수 있다”며 “고득점자도 몇달 손을 놓으면 성적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토익 성적이 높지만 영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강사 이보영(李寶寧)씨는 “라디오 영어프로그램에서 토익 만점을 받은 대학생과 영어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한사코 거부해 무산된 적이 있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생활영어 구사 능력은 향상됐지만 영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능력이 부족하기는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외교나 무역 분야 등에서는 보다 정확하고 수준 높은 영어가 필요하지만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기 어렵다. 한국은 영어로 생활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외국인투자자들이 동남아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현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직업외교관인데도 영어 능력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그는 말 한마디가 내용을 뒤바꿀 수 있는 민감한 외교 사안을 논의할 수준이 안돼 회담 때마다 통역을 대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 외교부장관은 영어가 안돼 도저히 협상을 못하겠다”고 불평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한 외교관은 “영어권 국가에서 근무해도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가 쉽지 않다”며 “자유토론을 하는 다자간 국제회의 등에 가면 한국 외교관들이 발언을 안하기로 유명하다는 조롱을 듣는다”고 말했다.

98년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국의 외채전환 협상 테이블에서 13개 세계 은행 대표들과 마주앉은 한국 재정경제원 실무협상팀은 초장부터 진땀을 흘렸다. ‘탄환’을 뜻하는 ‘bullet’이란 단어가 월가(街)에서는 ‘일시 상환’으로 사용되는데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자 이런 전문용어들이 쏟아져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능한 미국인 법률고문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답변을 도맡아줘 간신히 협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성신여대 최인철(崔仁哲·영어평가) 교수는 “최근 말하기 능력이 강조되다보니 오히려 독해나 영작 능력을 소홀히 해 영어교육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며 “각 분야에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초등교 이름뿐인 회화교육▼

영어 말하기 능력이 강조되면서 97년부터 초등학교 3, 4학년은 주 1시간, 5, 6학년은 주 2시간씩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지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교사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초중고교 영어교사 6만7464명 중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교사는 7.5%인 5074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4년에는 중3부터 고3까지 영어로 수업을 하도록 하고 연수를 강화하고 있지만 교사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평가다.

서울시교육청은 초중고교 내에 영어로만 이야기하는 ‘잉글리시 존(English Zone)’을 설치하고 올해부터 영어교사는 토플성적 600점 이상만 임용될 수 있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요즘은 해외에서 살다 온 학생들도 많아 교사들도 학생들 앞에서 주눅이 든다고 한다. 서울 J초등학교 영어 전담교사 이모씨(41)는 “해외연수에다 심화과정 연수까지 합해 모두 1000시간의 영어 연수를 마쳤지만 어려움이 많다”며 “발음은 CD 등을 이용해 원어민 발음을 들려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읽기와 쓰기 중심의 영어 교육을 진행하다가 지난해부터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도입된 중학교의 상황은 더욱 어렵다.

서울 D중 영어교사 최모씨(49)는 “문법 위주로 수업을 하다가 영어로 진행하려니 학생들 앞에서 ‘콩글리시’를 쓸까봐 걱정돼 새벽에 영어학원에 다닌다”며 “회화에 자신이 없는 영어 교사는 아예 전공을 바꾸기도 한다”고 말했다.한학성 경희대 교수는 “과원(過員) 교사에게 영어 부전공 교육을 시켜 영어전담교사로 배치하는 등의 한심한 교육정책을 계속하는 한 영어교육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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