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진곤/수능 '문제은행' 만들자

  • 입력 2001년 11월 11일 18시 51분


“넌 잘 하는 게 뭐니?” “공부는 못해도 태권도는 잘 해요. 바둑, 미술, 노래를 잘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그래, 공부만 잘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네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 앞으로 너희들이 대학에 갈 때는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 특기를 살리기 위해 따로 학원에서 과외도 받았다. 시중의 갑남을녀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의 교육을 책임진 교육부장관이 한 말이니까. 그래서 올해 수능시험을 본 소위 ‘이해찬 1세대’는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의 수능시험은 유달리 어렵게 나왔다.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망쳤다. 학원 강사들조차 잘 풀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수험생은 “정부가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하며 공부 안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시험을 이렇게 어렵게 출제하면 어쩌란 말이냐, 우리가 실험실 쥐냐”고 항의한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고 분노하는 학생도 있다. 작년에는 수능이 너무 쉽게 나왔다. 3, 4개만 틀려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실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수를 하지 않느냐 하는 경쟁이었다. 시험에 변별력이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올해는 정반대다.

수능시험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다. 수능이 어떤 시험인가. 우리나라 학생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능시험은 대학 진학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학생들은 수능에 맞춰서 공부한다. 수능에 나오지 않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실상 수능시험이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목표, 내용, 방법까지도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수능시험이 갈피를 못 잡게 되면 학교 교육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왜 이토록 중요한 수능시험이 물탕과 불탕을 번갈아 왔다갔다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수능시험의 출제기간은 20여일 정도 되지만, 실제로는 4, 5일 정도에 문제를 출제해야만 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에 난이도를 검증할 수도 없다. 해마다 바뀌는 출제교수들이 고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 제도 자체에 근본적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국 등과 같이 입시 전문기관에서 평소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난이도를 검증한 문항들을 많이 모아놓고, 이 가운데서 출제하는 문제은행 식으로 바꿔야만 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 정부는 이러한 장기대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기에만 급급하다. 다른 나라는 사설기관에서도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국가에서 하지 못하는가. 지금부터라도 안정적인 수능제도의 정착을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한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중고교시절을 충실하게 보낸 학생들은 입시준비를 따로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알맞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고교 시절은 결코 대학 가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희생해야 하는 시기가 아니다. 인간의 지적, 정서적, 도덕적 성장은 어느 순간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의 단계는 모두 나름의 독특한 의미와 특성을 갖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학생 시절이나 어른 시절이나 똑같은 내재적 충만과 절대적 욕구를 갖고 살아간다. 교육은 각 삶의 시기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의미와 특성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이 같은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입시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중고교 교육과정의 개편, 획일화된 고교 체제의 다양화, 대학의 다양화와 자율화, 사회인력 충원 방식의 제도적 개혁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제도적 개편이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치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임시 땜질식이 아닌 장기적이고 종합적이며, 앞을 내다보는 입시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정권은 바뀌어도 교육은 계속된다. 비록 정권 말기라 할지라도 이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정진곤(한양대 교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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