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붙은 '딸들의 전쟁'

  • 입력 2001년 10월 7일 18시 49분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후손들에게도 종원(宗員)의 자격을 인정해 종중(宗中) 재산을 나눠달라는 ‘딸들의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대다수 여성들은 이런 움직임이 여권 신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남성들은 “종중의 의무는 지지 않고 재산만 가져가겠다는 억지 소송”이라고 따가운 눈총을 보내면서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다.

▽최근의 소송 사례〓경주 김씨 문간공파의 여성 후손인 김모씨 등 10명은 7일 종중을 상대로 종중토지 판매대금 가운데 1억원의 배당금을 달라는 소송을 서울 남부지원에 냈다.

이에 앞서 청송 심씨 종중을 상대로 심모씨(65) 등 여성 후손 3명이 낸 소송과 용인 이씨 사맹공파 여성들이 종중을 상대로 낸 종원 확인소송 항소심 등이 이미 진행중이다. 이들은 올해 초 1심에서 모두 패소하고 현재 항소심에서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청송 심씨 여성 후손들의 경우 9월에 1인당 합의금 1000만원씩을 받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하도록 한 법원의 강제조정 결정에 불복, 이의신청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두 건 모두 재판 준비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아직 항소심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이밖에 성주 이씨 안변공파 여성 후손들이 낸 소송도 있었지만 이들은 1심에서 패소한 뒤 2심에서 1000만원씩을 받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쟁점과 전망〓‘딸들의 소송’은 외형적으로는 재산을 둘러싼 다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문의 평등한 후손으로 인정받기 위한 법정싸움으로 볼 수 있다. 즉 여성들이 유교사상에 기반한 남계혈통주의와 ‘출가외인’의 개념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대법원은 92년과 96년 ‘종중은 공동 선조의 분묘 수호, 제사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자로 구성되는 집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급심 재판부가 대법원 판결을 깬 사례가 거의 없는 데다 후손을 ‘남성’으로 한정시킨 종중 규약을 법원이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소송 결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일단 우세한 편이다.

한 남성 판사는 “출가 여성들은 남편이 그 가문에서 종원으로 인정받아 얻게 된 재산을 결국 공유하게 되는 것 아니냐”며 “제사와 묘지관리 등에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는 여성이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납득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판결의 변화 가능성〓그러나 최근 여성의 활발한 사회진출과 이를 통한 남녀평등 의식의 확산 등을 고려할 때 사법부의 판단도 바뀔 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10부(홍성무·洪性戊부장판사)는 8월말 청송 심씨 사건에 대한 조정을 진행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모두 같은 후손인데 남성들의 권리만 주장해서야 되겠느냐”는 취지로 양쪽을 설득한 바 있다.

청송 심씨 사건을 맡고 있는 신호양 변호사는 “법적으로는 승소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사회분위기도 변했고 당사자들이 헌법소원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끝까지 소송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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