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보재정 거덜]직장의보 2조2000억서 8000억으로

  • 입력 2001년 3월 14일 18시 49분


《지난해 실시한 의약분업과 의료보험 통합은 의료제도의 대변혁이었다. 약품 오남용을 줄여 국민 건강을 지키고 약값을 줄이는 것은 물론 의보재정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였다. 새 제도가 도입된 지 7∼8개월이 지난 지금 이같은 정책목표는 과연 달성됐을까. 의보 재정이 5월경 완전히 파탄날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로는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는 분석이다.》

▼의보통합은 改惡-재정 튼튼하던 직장의보까지 비틀▼

지난해 7월 단행한 지역과 직장의보 통합은 소득 재분배라는 사회보험의 취지를 살리고 통합의 효율성을 살리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여유 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형평 위주의 철학이 반영됐다는 것이 정책입안자들의 설명이었다.

현재 지역과 직장 모두 어려운 형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든 사람 역시 익사할 위험에 빠진 셈. 지역의보는 96년부터 당기 적자가 발생해 적립금이 8141억원에서 지난해 말 364억원으로 줄었다.

직장의보는 97년 2276억원, 98년에 3826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적립금이 2조2000억원 이상 남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의보통합이 추진된 99년부터 직장의보의 적자 규모가 커져 적립금이 지난해 말 8359억원으로 줄었다.

종전에 139개 직장의보조합은 각자 ‘자기 돈’을 철저히 관리하고 필요하면 의보료를 적정 수준 올려 튼튼했다. 하지만 통합이 거론되자 재정은 국가(국민건강보험공단)가 책임질 것으로 생각해 의보료를 안 올리고 적립금을 마구 써 적자가 커지고 적립금이 줄었다.

지역의보 역시 조합이 통합되면서 의보료 징수율을 높이는 노력을 게을리해 재정 불안정을 부채질했다. 96년 이전 97% 이상이던 의보료 징수율이 의보통합 얘기가 나오면서 크게 낮아졌다.

▼약품 오남용 여전-4세 어린이에게 하루 19종 처방도▼

약 처방시 사용되는 항생제 수는 1건에 0.4∼0.5개, 주사처방은 방문건수당 0.6회(처방률 60%)로 분업 전과 큰 차이가 없다.

네살짜리 어린이에게 먹는약 12종과 주사제 5종 등 모두 19종의 약을 처방하거나, 부작용 때문에 하루 1정으로 사용이 제한된 약을 하루에 3정씩 한달간 먹도록 처방하는 의원도 있을 정도.

최근에는 의료기관과 약국이 서로 짜고 처방전을 몰아주는 과정에서 과잉 처방이 늘어나는 추세여서 분업의 근본 취지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주사제 처방률을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17% 수준으로 낮추고 고가 약 처방시 해당 병의원의 진료비를 삭감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계는 ‘진료권 침해’라며 강력히 반발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의료기관 및 약품 오남용 관행은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현상이라 쉽게 바꾸기 힘들다. 약을 많이 먹지 않고 주사를 맞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약과 주사 처방을 요구하는 환자들의 인식도 문제.

정부 관계자들은 의약분업의 장점이 장기적으로 나타날 게 확실하므로 당장 성과를 기대해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정부가 의료계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보다는 대결 및 갈등구조 속에 의약분업을 도입했기 때문에 분업의 성공적인 정착이 늦어지게 됐다.

▼국민불편만 늘었다-주사제 범위 계속 변해 환자들 혼란▼

약사법 개정이 늦어지면서 일반 주사제를 분업에서 제외할지가 결정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이후 분업에 포함되는 주사제의 범위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환자들은 혼동을 겪고 있다.

이런 틈을 타 일부 의료기관은 원외처방을 해야 할 주사제를 원내에서 그냥 놔주기도 한다. 병원에 주사제를 쌓아놓고 환자에게 놓아준 뒤 약국에서 그 주사제를 사오라는 편법도 동원된다.

의료계 요구에 밀려 일반의약품의 낱알판매를 금지하는 바람에 환자들이 약을 10알, 20알 이상 사는 것도 문제. 필요 이상 구입한 약은 버리거나 나중에 먹게 돼 낭비 또는 남용을 부추기는 셈이다.

시민단체는 일반 주사제의 분업 제외가 원칙에 어긋나며 일반약 낱알판매 금지도 타당성이 없다며 정부를 비판하고 개정을 요구하지만 의료계는 강력히 반대한다.

정부는 국민이 불편하더라도 분업이 정착되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를 믿는 국민을 별로 없다. 시범사업을 실시해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은 채 서둘러 분업을 추진해 애꿎은 국민만 ‘불필요한 불편’을 겪게 됐다.

<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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