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곳없는 우리아이들]안전사각지대로 내몰린다

  • 입력 1999년 10월 31일 23시 11분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는 우리 사회의 고질인 안전불감증과 청소년들을 싸구려 술집으로 내모는 일그러진 청소년 문화가 뒤섞여 빚어진 참극이었다. ‘안전빵점지대’인 10대 상대 유흥가의 안전 실태, ‘출구 없는’ 청소년 놀이 문화 등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어, 이상하다 분명 비상구가 있었는데….”

31일 오후6시경 서울 성북구 돈암동과 동선동 일대 지하철 성신여대입구 역 부근 유흥가. 134명의사상자를낸인천 호프집 화재참사가난지채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일대 업소는 평소 휴일과 다름없이 수천명의 10대 청소년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유흥가 청소년 북적▼

본보 취재팀이 한 4층 건물의 지하1층에 있는 S콜라텍(음료수를 마시며 춤을 출 수 있는 청소년 놀이공간)에 들어가자 안에선 수십명의 청소년이 춤을 추고 있었다. 화재 등에 대비한 비상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 종업원이 마지못해 취재진을 안내했다. 그러나 1층을 향해 나 있는 비상구 통로에는 헌탁자, 빈술병박스 등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장애물을 치우고 비상구 출구를 향해 가보니 비상구 끝은 아예 콘크리트벽으로 막혀 있었고 종업원은 난처한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야말로 ‘출구 없는 비상구’였던 것.

▼업소 비상구 봉쇄▼

불이 붙으면 유독가스를 내뿜을 내장재, 잠겨 있는 비상구, 비좁은 통로, 고장난 소화기…. 그 속에서 발밑에 도사린 위험도 모른채 술을 마시거나 전자오락에 몰두하는 앳된 청소년들.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는 ‘어른들의 검은 상혼’과 ‘갈곳없는 10대의 놀이문화’가 뒤섞여 청소년들의 꽃다운 생명을 앗아간 참사였다. 그러나 이는 비단 인천의 ‘라이브Ⅱ 호프집’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은 아니다.

취재팀이 31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대도시의 주요 10대 상대 유흥가를 점검한 결과 대부분 ‘안전 빵점지대’라고 해도 무방한 상태였다. 제대로 방염처리된 실내장식재를 쓴 곳은 찾기 힘들었고 업주나 종업원들의 안전 의식도 인천 참사전에 비해 거의 달라진 게 없어보였다.

이날 오후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 신천역 주변 유흥가의 한 PC게임방. 좌석은 꽉 차있고 입구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청소년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곳의 복도와 계단 모두 가연소재인 카펫으로 돼 있었고 칸막이는 나무였다. 한 호프집 주인은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을 상대로 싼 술값으로 박리다매를 하다보니 값싼 자재로 실내장식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북구 동선동 한 건물 지하1층에 있는 H콜라텍은 비상구 철문을 굳게 잠가 놓았다. 이 업소 종업원은 “계산을 안하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막으려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대부분 소방시설 없어▼

인근 한 건물 3층에 있는 노래방과 비디오감상실은 비상구는 커녕 두 업소가 1개의 출입구를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지방 대도시도 상황은 비슷했다. 광주에서 이른바 ‘10대들의 해방구’로 불리는 북구 용봉동 전남대후문 일대 한 건물 지하에 있는 소주방 주인은 비상구를 잠가놓은 이유를 묻자 “우리집은 불날 일이 없으니 귀찮게 굴지 마라”고 큰 소리를 쳤다.

청소년들이 주로 찾는 유흥업소는 법적으로도 ‘안전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다. 현행 건축법은 지하2층, 지상5층 이상의 건물에 대해서만 상시출입구외에 바깥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번 인천 사고 건물처럼 청소년들이 주로 찾는 유흥업소의 경우 대부분 비상계단 의무설치 대상에서 제외된 건물에 입주해 있는 실정.

게다가 호프집 소주방 등은 일반 음식점으로 분류돼 지상에 있는 업소의 경우 비상구 비상벨 등 소방시설 의무설치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이명건기자·부산·광주〓조용휘·김권기자〉gun4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