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극복 노력」 상징적 3대사건]

  • 입력 1998년 8월 9일 20시 27분


▼평화공존의 틀 「기본합의서」

남북은 91년 12월 13일 평양에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을 갖고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이 분단후 처음으로 평화공존의 원칙과 방법에 합의한 것이다. 그것은 분단극복을 위한 가장 진지하고 체계적인 노력이었다. 합의서에는 평화 공존, 상호불가침, 경제협력과 교류에 관한 원칙과 그 방법들까지 세세히 명시돼 있다.합의서는 정부의 적극적 대북 포용정책과 동구 공산권의 몰락 등 국제정세의 변화가 맞물려 탄생했다. 기본합의서는 그러나 채택만 됐을 뿐 그후 남북관계의 악화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합의서의 실천이 곧 분단극복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는데에 이견은 없다.

▼『오마니…』눈물의 이산가족 재회

이산가족 교류는 분단의 아픔을 체감케 하는 동시에 그 극복의 당위성을 일깨운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남북은 이산가족 재회를 위해 71년 8월 첫 적십자회담을 가진 이래 그동안 70여회의 각종 회담을 가졌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북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산가족을 상봉케 한 것은 85년 9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대상은 남측 35가구와 북측 30가구에 불과했다. 이에 실망한 이산가족들은 이후 개인적으로 제삼국을 통해 북녘의 가족들과 접촉해야 했다. 남북간 주민접촉이 허용된 89년 이후 올 상반기까지 통일부로부터 승인을 받아 이산가족을 만나거나 생사를 확인한 사람은 모두 1천1백75명이다.

▼충격과 파문 「민간인 밀입북」

민간인들의 잇단 밀입북 사건은 일종의 충격요법적인 분단극복운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의도했던 대로 남북관계 개선을 앞당겼는지에 대해서는 의문과 비판의 소리가 많았고 이런 의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89년 3월25일 문익환(文益煥)목사가 중국 베이징(北京)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이어 그해 6월 21일에는 당시 외국어대 용인캠퍼스 프랑스어과 4년생이던 임수경(林秀卿)양이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동베를린을 거쳐 밀입북했다. 이들의 밀입북은 결국 재야와 학생운동권 종교계 정치권 등에 대한 당국의 대대적인 수사로 이어졌고 남북관계는 한동안 경색을 면치 못했다.

〈한기흥기자〉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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