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30대 가장의 편지]『용돈 5백원들고 일터로…』

  • 입력 1997년 12월 25일 20시 29분


정보통신업체인 A기업에서는 요즈음 직장생활 6년차인 30대 직원이 사내통신망에 띄운 「쌀 한봉지」라는 제목의 애절한 내용의 편지가 동료직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시대를 맞아 감봉과 감원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의 심정을 솔직하게 담은 이 편지를 읽은 동료직원들은 복사한 편지를 아내에게 보여주며 남편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고 있다. 『어제 아내와 시장엘 들렀다. 찬거리를 사러 가는 줄 알고 동행했는데 아무것도 안 사고 비닐 봉지에 든 1㎏짜리 쌀 두봉지를 사고 나왔다. 속도 모르는 나는 어디 놀러가느냐고 물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직장생활 6년째로 지난해 10월 결혼해 백일이 막 지난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의 11월 봉급명세와 지출내용은 이렇다. 세금과 의료보험 기타공제를 한 실수령액은 1백9만원이다. 그러나 25일 월급을 받으면 5일만에 11만6천원밖에 남지 않는다』 그가 밝힌 지출내용은 우선 25일 부모님과 장인어른 환갑을 위해 든 적금 3개(16만5천원), 26일에는 자동차 교육 손해 생명보험 등 4개(28만원)의 보험료가 월급봉투에서 빠져나간다. 또 27일에는 시영아파트(17평)의 전세금중 농협 대출금 2천만원에 대한 이자 24만원이 결제된다. 이밖에 아파트 관리비 11만원, 가스 전화 PC통신 우유대금 등이 8만원으로 30일까지 월급봉투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돈은 모두 97만4천원. 그는 『세식구가 격월로 받는 「상여 아닌 상여」 때문에 살아왔는데 8월과 10월 상여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보험적금에 차질을 빚었고 공과금에 과태료를 물었다』며 막막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12월에는 아기의 감기 치료비와 경조사비(3명의 직원이 결혼했고 친구결혼식에는 가지도 않았다)로 생활비가 바닥났다. 『며칠전 우리 아기의 백일이었지만 사진 몇장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결혼 후 부모님께 용돈 한번 못 드렸다. 나는 술도 안먹고 아침도 안먹고 담배도 안피운다. 하루 5백원과 도시락을 받아 출근하는데 5백원은 전철에서 사보는 신문(3백원)과 유일한 기호품 껌(2백원)값이다. 속모르는 동료들은 도시락 싸다니면서 엄청난 저축을 하는 줄 안다』 밝고 맑던 아내가 새벽에 일어나 봉급이 15% 깎이면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면서 우는 것을 보았다는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일부터 아기를 업고 일거리를 알아보러 다닌다기에 잠이나 자라고 소리지르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지만 앞날이 막막하다』 〈전승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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