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盧씨 사면]뒤바뀐 영욕…극과 극의 18년 드라마

  • 입력 1997년 12월 21일 20시 24분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이 22일 수감생활 2년만에 석방됨으로써 79년 12월12일 시작된 한국현대사 최대 드라마는 18년만에 일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영욕으로 점철된 전,노씨 주역의 이 드라마의 시작은 「12.12쿠데타」. 12.12는 전,노씨 등 하나회 출신 군부세력이 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을 김재규(金載圭)내란사건 관련혐의 조사를 이유로 불법연행한 뒤 군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 12.12를 계기로 전씨는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면서 이른바 신군부의 실권을 한손에 장악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은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5.18 광주민주항쟁 무력진압」이라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들은 80년 6월 초헌법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8월 최규하(崔圭夏)대통령 하야 등 일련의 권력찬탈 시나리오를 일사천리로 진행해 마침내 80년 11월 전씨를 11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씨는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우며 언론통폐합 삼청교육 등 초법적인 조치를 밀어붙이며 강압통치를 이어갔다. 강압통치로 빚어진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 등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으로 6월항쟁을 촉발하고야 말았다. 결국 87년 6월 전,노씨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13대 대선은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전씨의 후계자인 노씨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현명한 국민은 88년 4월 실시된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국회를 만들어냄으로써 12.12와 5.18에 대한 법적 책임문제가 새롭게 제기됐다. 6공정권 출범과 함께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전씨의 친인척 부정비리는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결국 전씨가 88년 11월23일 자신의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백담사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전씨는 백담사 생활 1년만인 89년 12월31일 국회 5공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한 뒤 90년 1월1일 새벽 다시 백담사로 돌아갔다. 그는 1년여 동안 백담사 유배생활을 더 한 뒤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전씨의 유배생활로 12.12와 5.18사건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는 듯했다. 93년 2월 집권한 김영삼대통령이 12.12사건을 「쿠데타적(的)사건」으로 규정하고 과거청산 의지를 밝히면서부터 이 문제는 다시 현안으로 등장했다. 그해 7월19일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 등 22명이 두 전직 대통령 등 38명을 내란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소고발하면서부터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고소고발인 조사를 시작으로 전,노씨 서면조사 등 방대한 검찰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94년 10월29일 검찰은 1차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전씨를 「반란 수괴」로 규정하면서도 이들에 대해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것. 그후 정전총장이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에 불복해 서울고검과 대검에 항고와 재항고를 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정전총장은 11월24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도 냈지만 95년 1월20일 헌재는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고 결정함에 따라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는 듯했다. 95년 10월 당시 민주당 박계동(朴啓東)의원의 비자금 폭로는 모든 것을 일거에 뒤집어버렸다. 비자금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95년 11월16일 사상 처음으로 전직대통령인 노씨를 비자금 조성혐의로 구속했다. 이어 김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를 선언하고 「5.18 특별법」제정을 공식화했다. 그러자 검찰은 95년 11월30일 서울지검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고 「성공한 쿠데타」와 대통령 재임 시절 조성한 비자금에 대한 전면재수사에 나섰다. 전씨는 문민정부의 이같은 방침에 반발해 12월2일 이른바 「골목 성명」을 발표한 뒤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씨는 낙향 다음날 새벽 서울로 압송돼 구속수감됐다. 이로써 전,노씨의 쿠데타는 16년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2.12 관련자 35명과 5.18 관련자 47명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검찰은 95년 12월21일 「5.18특별법」이 공포되자마자 전,노씨 등 34명을 반란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반년에 걸쳐 53차례의 공판과 74명의 증인신문이 진행된 끝에 96년 8월말 전씨는 사형, 노씨는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2심에서 「전씨는 무기징역, 노씨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됐으며 지난 4월17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이들은 2심 형량이 확정돼 그동안 수감생활을 계속해왔다. 전,노씨에 대한 사면은 대법원 형확정 이후 시기문제만 남겨둔 상태였다. 특히 유력 대통령후보들이 모두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대선 후 사면은 기정사실처럼 돼 있었다. 〈조원표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