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교수 고정간첩활동 내용]61년 공작금 千달러

  • 입력 1997년 11월 20일 20시 24분


고영복교수는 5월 정신문화연구원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보수 우익세력의 단결을 강조하는 등 우익인사로 행사하며 36년간 간첩활동을 해왔다. 다음은 안기부가 밝힌 고교수의 간첩 혐의 내용.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그는 9월 의용군에 자진 입대, 인민군으로 국군과 대항해 싸우다 11월 생포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53년 6월 반공포로로 석방된 뒤 60년을 전후해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사상에 심취, 좌익성향을 띠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삼촌 고정옥은 서울대 국문과교수로 재직중 6.25가 터지자 자진 월북,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를 간첩으로 포섭하는데 중간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61년 9월 이화여대 강사로 일하던 그는 삼촌 고정옥이 보냈다는 남파공작원을 만나 공작금 1천달러와 난수표 등을 받으면서 고정간첩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그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학생들 속에 조직사업을 전개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수산」이라는 공작부호도 부여받았다. 66년 7월부터 9월까지 그는 「노영복」이라는 남파여자공작원과 수차례 접촉, 자신의 집 근처에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노영복 대신 북한에 「안착(安着)」보고를 하기도 했다. 저명한 사회학자로 성장한 그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린 73년 3월과 7월 남측자문위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북측자문위원으로 위장한 대남공작원 강장수(72)와 은밀히 접촉, 남한측의 회담전략을 사전에 알려주기도 했다. 『회담 막바지에 남한측에서 이산가족 확인 및 상봉을 위한 면회소 설치를 제안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힌 메모지를 강장수에게 전달한 것. 89년 10월에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 공작원 김낙효와 함께 공작장비 등을 숨길 「드보크」 장소를 물색하기도 했다. 김낙효로부터 『학생운동권 출신자와 재야활동가, 동료교수 김모씨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추진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고교수가 부부간첩과 네차례 접촉하는 가운데 『전자주민증과 우량옥수수 종자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최정남의 요구에 따라 한국정치 학생운동 한미관계 등에 관한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부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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