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부슬부슬 비 내리는 강마을,이 밤 녹림호객(綠林豪客)이 내 이름 듣고 알은체한다.다른 때라도 내 이름은 숨길 필요 없겠네.지금은 세상 절반이 다 그대 같은 도적이려니.(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정란사 마을에서 묵다 만난 밤손님(정란사숙…
홀로 앉아 하얘진 귀밑머리 걱정, 텅 빈 방 어느새 이경(二更)에 다가선다.빗속에 떨어지는 산 과일, 등불 아래 울음 우는 풀벌레.백발은 결국 검어지기 어렵고, 단약(丹藥) 황금도 만들 수가 없다네.늙음과 질병을 없애려 한다면, 오직 한길 무생무멸(無生無滅)의 불도를 터득하는 것.(獨…
이끌어주는 사람 없는 길엔 잡초 삭막하고,예로부터 그대 사는 깊은 숲은 시장이나 조정과는 멀었지요.이 세상에 공평한 것이라곤 백발 하나뿐,귀인의 머리라고 봐줄 리 없다오.(無媒徑路草蕭蕭, 自古雲林遠市朝. 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은자를 보내며 쓴 절구 한 수’(송은자일절·送…
의사가 수고비 달라는데, 내 어디 그런 큰 재물이 있나.정정(整整)이란 가기가 하나 있는데, 쟁반 나르고 밥 푸는 잔시중은 들 수 있지.내가 즐기던 가무는 적막해졌고, 이제 남은 건 피리 몇 가닥.정정이 이런 사정을 살펴, 마나님께 잘 지내시라 인사 고하네.(醫者索酬勞, 那得許多錢物.…
누렁소 사고 농사일 배워, 숲속 샘물가에 초가집 지으리.늙어서 살날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차라리 몇 해라도 산속에서 지내고 싶네.높든 낮든 벼슬살이란 한바탕의 꿈, 시 짓고 술 마실 수 있다면 그게 곧 신선.세상만사 다 가치가 늘어난대도, 늙고 나니 내 문장은 한 푼어치도 안 되는구…
북방의 말과 무소 갑옷으로 무장한 반란군이 지축 흔들며 쳐들어오자,황제는 양귀비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자신 또한 결국엔 재가 되었지.군왕으로서 진작 그녀가 나라 망칠 줄 알았더라면,황제의 가마 굳이 마외(馬嵬) 언덕을 지나 피란 갈 일 있었겠는가.(冀馬燕犀動地來, 自埋紅粉自成灰. 君王若…
아득히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십 년. 생각 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네.천 리 밖 외로운 무덤, 내 처량한 심사 호소할 길 없구나.우리 만난대도 알아보지 못하리. 얼굴은 세속의 때에 절고, 귀밑머리엔 서리 내렸으니.지난밤 아련한 꿈결 속 문득 찾아간 고향. 작은 창가에서 치장하고 있던 …
날 버리고 떠난 지난 세월 붙잡을 수 없고, 내 맘 어지럽히는 지금 시간 근심만 가득하네.세찬 바람에 만 리 먼 길 날아온 가을 기러기, 저들 바라보며 높은 누각에서 술을 즐긴다.그대 문장엔 건안(建安) 시대의 강건한 기개, 내 시엔 그 다음 시대 사조(射眺)의 청신한 기풍.우리 함께…
차가운 산 시월의 아침, 서리 맞은 나뭇잎 일시에 바뀌었다.타는 듯해도 불이 난 건 아니요, 꽃 핀 듯하지만 봄이 도래한 건 아니라네.가지런히 이어져 짙붉은 장막을 펼친 듯, 마구 흩날려 붉은 수건을 자른 듯.단풍 구경하려고 가마 멈추고, 바람 앞에 선 이는 우리 둘뿐이려니.(寒山十月…
둥근달 찬 하늘에 떠오르면 사람들은 세상이 다 같다고 말하지만,천 리 밖 비바람이 몰아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리오.(圆魄上寒空, 皆言四海同. 安知千里外, 不有雨兼风.)―‘한가위 보름달(중추월·中秋月)’ 이교(李嶠·약 644∼713)
하늘은 오늘 밤 저 달을 띄워, 온 세상을 한바탕 씻으려 하네.더위 물러나자 높은 하늘 더없이 깔끔하고, 가을 맑은 기운에 만상이 산뜻하다.뭇 별들은 달에게 광채를 양보하고, 바람결에 이슬은 영롱하게 반짝인다.인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유유자적 저 신선의 세계이려니.(天將今夜月,…
책은 마음에 들수록 금방 다 읽히고, 손님은 뜻이 맞을수록 기다려도 오질 않네.세상사 어긋나기가 매번 이러하니, 인생 백년 맘 편할 때가 얼마나 되랴.(書當快意讀易盡, 客有可人期不來. 世事相違每如此, 好懷百歲幾回開.) ―‘절구(絶句)’ 진사도(陳師道·1052∼1101)
산 위의 눈처럼 고결하고, 구름 사이 달처럼 밝아야 하거늘.당신이 두 마음을 품었다기에, 결별을 고하러 찾아왔소.오늘은 술잔 놓고 마주하지만, 내일 아침엔 작별하려 저 도랑가에 있겠지요.도랑가 주춤주춤 배회할 때면, 도랑물도 동으로 흘러가 버릴 테지요.처량하고 또 처량한 이 마음, 시…
어느새 초가을이라 밤 점차 길어지고, 청풍 산들산들 더더욱 서늘하네.이글이글 무더위 사라진 고요한 초가, 계단 아래 풀숲엔 반짝이는 이슬방울.(不覺初秋夜漸長, 清風習習重凄凉. 炎炎暑退茅齋靜, 階下叢莎有露光.)―‘초가을(초추·初秋)’ 맹호연(孟浩然·689∼740)
이백을 못 본 지 오래, 미친 체하는 그가 참으로 애처롭네.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죽이려 하지만, 나만은 그 재능을 몹시도 아끼지.민첩하게 지은 시 일천 수나 되지만, 떠도는 신세 되어 술잔이나 기울이겠지.광산 옛 마을 그가 공부하던 곳, 머리 희었을 지금이 돌아오기 좋은 때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