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승훈]대통령의 말과 글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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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상생’ ‘문화’ ‘창조’ ‘융합’ ‘콘텐츠’….

 설마 이런 단어가 나쁜 의미로 쓰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이 말을 들으면 권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후안무치한 날도둑질만 떠오르게 됐다.

 시작은 ‘상생과 공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내걸면서 자주 쓰던 용어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대통령 취임식 행사부터 중소기업 대행사에 맡겼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임기 중반 대기업 총수들과 직접 독대하며 수백억 원 규모의 재단을 만들고 나선 것은 아이러니다. ‘상생과 공존’은 최순실과 차은택이 급조해 만든 ‘K’자로 시작되는 신생 기업들도 나랏일을 싹쓸이 수주할 수 있다는 말로 변질됐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차은택이 포스코 계열의 광고사를 강탈하려 했을 때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인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거들기도 했다.

  ‘문화융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역대 정부 최초로 문화 정책이 4대 국정기조에 포함되자 문화계의 기대는 컸다. 프랑스의 문화대통령으로 칭송받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10분의 1만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미테랑은 1981년 취임 후 문화 진흥을 위한 ‘그랑프로제’를 내걸고 오늘날 파리의 관광명소가 된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초현대식 미테랑 국립도서관, 라데팡스 등을 건설했다. 이후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를 넘어 세계의 문화수도로 거듭났다.

 그러나 현 정부의 ‘문화융성’은 비선 실세의 가족과 친구만 융성시키는 정책이었다. 분야도 케이팝, 한식, 영상 콘텐츠 등 돈 되는 문화산업에만 집중됐다. 한 출판인은 페이스북에 “출판계는 돈이 안 돼서인가 차은택, 최순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자조했다. ‘문화창조융합본부’ ‘국가브랜드’ ‘케이스타일 허브’ 등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문체부 담당 직원조차도 무슨 뜻인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서점가에는 ‘대통령의 말하기’와 ‘대통령의 글쓰기’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국정 농단 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해석이 난무할 때 얼마나 부패의 악취가 진동하는지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하기’ 책에서 저자는 ‘생각이 곧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도자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표현은 끊임없는 사색의 결과이며, 철학에서 나온 말이어야 진정한 내 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즉각적으로 판단·결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화융성’ ‘창조경제’와 같은 국정기조도 자신의 철학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비선 실세의 개입을 필요로 했고 그들의 농단에 휘둘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몰린 촛불시위의 민심은 분노에 앞선 부끄러움이었다. 대통령이 진짜가 아닌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의 기본적 말과 글조차 믿을 수 없다는 국가적 신뢰 붕괴에 대한 절망이었다. 그러나 100만 시민은 분노를 절제하고, 축제와 같은 평화시위를 해냈다. 외신들은 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위라며 놀라워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통령에게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을 더 이상 추락시킬 수 없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집단적 자각의 현장이었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문화융성#박근혜#대통령의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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