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까지 지낸 아버지가 눈앞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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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남북 이산상봉]
18차례 상봉 눈시울 적신 장면들
아들 얼굴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눈물… “딸 버리고 갔는데 무슨 엄마” 통곡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총 18차례 열렸다. 6·25전쟁 피란길에 헤어진 엄마와 딸이 다시 만나 울고, 전사자로 처리됐던 국군포로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 오열했다. 그 장면을 취재하던 기자도 울고, 그렇게 전해진 애절한 사연에 온 국민이 같이 울었다.

그 가슴 저미는 현장을 지켜온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감동과 감격의 장면을 돌아본다.

○ “109세 어머니가 살아 계신 걸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

2000년 8월 1차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들떠 있던 장이윤 씨(71·이하 당시 나이)는 북한에 있는 109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믿지 않았다. 애타는 마음에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밤마다 술을 마시던 그였다. 하지만 상봉 대상자 집결장소로 들른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이 “그나마 조카라도 살아 있어서 다행입니다”고 인사를 건네자 장 씨는 박 장관을 끌어안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부모 자식 간 석별의 한(恨)은 이산가족 상봉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2005년 8월 11차 상봉의 1차 상봉단 행사 마지막 날 1·4후퇴 때 남으로 피란한 김기심 씨(86)는 딸 최희순 씨(63)가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주던 동요 ‘만남’을 부르자 “딸을 버리고 가는 엄마가 무슨 엄마냐”며 통곡했다. 1978년 납북된 김영남 씨(45)는 2006년 6월 14차 상봉에서 28년 만에 어머니 최계월 씨(82)를 만났다. 그해 4월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이 김영남 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 뒤 김 씨의 생존이 처음 확인된 날이기도 했다.

○ “어머니, 눈 좀 뜨시라요”

2005년 8월 15일은 남북 20가족씩 모두 40가족이 처음으로 이산가족 화상(畵像) 상봉을 가진 날이었다. 북에 남겨두고 온 딸들을 57년 만에 만나기 위해 온 김매녀 씨(98)는 이날 상봉장에 왔지만 2004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입원했던 탓에 딸 황보패 씨(78)와 학실 씨(76)를 화면 앞에 두고도 눈을 뜨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001년 2월에 있었던 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는 처음으로 국군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의 만남이 이어졌다. 1969년 피랍된 KAL기 여승무원이었던 성경희 씨(55)의 어머니 이후덕 씨(77)는 평양 고려호텔에서 북한군 중사로 있는 외손자 임성혁 씨의 거수경례를 받기도 했다. 이민관 씨(60)는 2010년 10월 18차 상봉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국군포로 아버지 이종렬 씨(90)를 만나 “돌아가신 줄 알고 제사까지 지냈다”며 목 놓아 울었다.

○ 헤어진 가족 만나는 길을 병마가 어찌 막으리오

1971년 당시 주서독 한국대사관에서 노동부 파견 노무관으로 일하다 납북된 유성근 씨(71)의 동생 종근 씨(62)는 형을 보자 와락 부둥켜안고 울었다. 종근 씨는 “암에 걸려 죽을 뻔했지만 형님 보려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며 “건강하게 오래 살자”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1차 상봉에서 위암을 견디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이덕만 씨(87)는 북에서 내려온 안순환 씨(65)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하염없이 울며 말했다.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이산상봉#남북 이산가족#금강산#국군포로#전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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