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北 연평도 포격도발 2년]지나친 대북강경책이 도발 불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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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들으려 내 아들 목숨 바쳤나… 먹먹한 가슴 송곳으로 후비다니…
■ 故 서정우 하사 어머니의 아물지 않는 상처 2년

故 서정우 하사
故 서정우 하사
먹먹한 가슴은 채워질 리 없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무용지물이었다. 악몽 같은 그날 이후 730여 일이 흘렀건만 뻥 뚫린 어미의 마음에는 매일 휑한 바람이 불었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던 날 연평도를 감싸고 있던 초겨울 해풍(海風)처럼 차가운 바람이었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을 거둔 고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씨(52)는 22일 “아들이 하늘나라로 간 지 2년 됐지만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포격 1주기를 맞아 찾은 연평도는 차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옅어진 포격의 상흔 속에서 사람들은 그날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 ‘왜 안 오지’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해보지만 ‘죽은 아들은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시간이 연평도의 상처를 아물게 했지만 김 씨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2009년 2월 16일 해병대에 입대한 아들은 그날 휴가를 나오기 위해 선착장에 있었다. 그해 12월 20일이면 제대였다. 마지막 휴가였다. 그때 포격이 시작됐다. 군인인 아들의 뜨거운 몸으로 빙하처럼 차가운 금속 포탄이 덮쳤다. 청춘은 피우지도 못 한 채 그 자리에서 온기를 빼앗겼다.

아들을 현충원에 묻고 한동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 있을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려 고개를 숙이면 ‘아들이 이 땅에 묻혔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밀려와 시선을 둘 수 없었다.

김 씨는 아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 하사의 어린시절, 군대생활 모습을 글로 적었다. 신문에 나온 아들 이야기도 모았다. 김 씨는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 어미가 숙명적으로 버텨야 하는 인고(忍苦)의 시간 동안 아들을 잃은 한 국민의 아픔을 정리하고 싶었다”며 “한 아이가 북한의 도발에 희생되고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스스로 치유하려 해도 속상한 적이 많았다. 그는 “지나친 대북 강경책이 (포격 도발) 사건을 불렀다는 말이나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을 들을 때에는 아들이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목숨까지 바쳐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런 말을 쉽게 하는 이들은 ‘살인을 할 만했다’고 살인자를 두둔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을 송곳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는다고 했다.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재판이라도 할 수 있다면 (북한의 도발 책임자가) 처벌받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씨는 그날의 만행을 기억하자고 했다. “우리 아들이니까…내 자식이니까 잊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안보는 군인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나라는 군인만 지키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경각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들을 잃고서 깨달았다”고 말했다. 24일 아들과 고 문광욱 일병이 목숨 바쳐 지킨 연평도에 간다는 김 씨는 “그날을 기억하자”고 몇 번이고 힘주어 말했다.

○ 취재기자의 뒷얘기

제 고향은 백령도입니다. 2010년 고향 서남쪽 해안에서 46명의 청춘을 앗아간 천안함 폭침사건을 취재했고 연평도 포격 도발 때도 취재를 맡았습니다. 서 하사 어머니의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할 때 ‘차가운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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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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