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 반대단체 출신에 휘둘린 與… ‘안보 우선’ 원칙 저버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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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군기지 내년 예산 1327억→49억으로 96% 삭감

이용선 공동대표
이용선 공동대표
《 지난해 좌파진영의 반대투쟁으로 난항을 겪은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이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또 한번 상처를 입었다. 방위사업청이 신청한 예산액의 96%가 삭감되면서 사업 진행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공방 속에 사업이 좌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해군은 완공 시점을 2014년에서 2015년으로 늦춰 잡았다. 》
예산심의 과정에서 좌파진영의 요구에 휘둘린 것은 한나라당이 예산안의 여야 합의 처리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안보 우선’ 원칙마저 저버리고 한나라당이 ‘묻지 마 식 양보’를 했음에도 예산안은 민주통합당의 불참으로 합의 처리에도 실패했다. 집권 여당의 전략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낸 셈이다.

○ 민주당의 ‘뒤집기’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여야 간 최종 협상안에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 예산의 절반 정도를 삭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당초 방위사업청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에 1327억 원을 신청했다. 이 중 80%인 1061억 원은 항만과 육상 공사비였다.

하지만 국회 예산정책처는 제주해군기지 사업이 오랜 기간 중단돼 예산이 많이 남은 만큼 방위사업청이 요청한 예산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지난해 6월 말 좌파 단체들은 기지가 들어설 서귀포시 강정마을로 몰려들어 공사현장을 점거해 두 달 넘게 공사가 중단됐다. 지난해 9월 이후에도 끊임없는 반대 시위로 공사가 차질을 빚으면서 지난해 배정된 예산 1515억 원(2010년 이월예산 331억 원 포함) 중 71%인 1084억이 남았다.

한나라당도 지난해 쓰지 못한 예산을 감안해 공사비의 절반 정도는 줄일 수 있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예산안 처리를 코앞에 둔 지난해 12월 30일 갑자기 당론이라며 제주해군기지 사업 예산의 전액 삭감을 한나라당에 요구했다.

이날 민주당 이용선 공동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 여당이 제주해군기지 예산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건설 절차의 부당성이나 목적의 부적합성은 누누이 제기됐다. 전액 삭감을 당론으로 정하고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는 이어 “정부 여당은 평화의 섬 제주도에 쓸데없는 군사적 분열을 조성하는 해군기지 건설을 철회하고 예산삭감에 동의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 공동대표는 지난해 5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구성된 ‘시민평화포럼’의 공동대표를 맡았었다. 이런 전력을 가진 이 공동대표가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제주해군기지 사업비의 전액 삭감은 민주당의 당론으로 채택된 것으로 알려졌다.

○ 한나라당의 ‘무기력’

결과는 이 공동대표의 ‘기대’대로였다. 한나라당은 전액 삭감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전체 요구액의 4%에도 못 미치는 49억3000만 원의 예산만 남김으로써 사실상 해군기지 사업을 크게 위축시켰다. 대외적으로 해군기지 건설이 여당에서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사업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한나라당의 예결특위 관계자는 “민주당 원혜영 공동대표와 막바지 타협을 시도했지만 ‘제주해군기지 사업비를 전액 삭감하지 않으면 예산안 통과에 반대하겠다’고 나와 설계비와 토지보상비 일부만 남기는 쪽으로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도 사업비 일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계속 추진할 사업임을 공식화한 점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남은 예산에 올해 예산을 합쳐 추진 속도를 높이려던 계획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공사 진척도는 23%로 당초 목표인 33%보다 10%포인트 밑돌고 있다. 하지만 한 관계자는 “지난해 미집행액 1084억 원이 이월돼 당장 공사를 하기엔 무리가 없다”고 말해 군이 과연 공사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했다.

○ 차기 정부서 제동 걸리나

지금도 강정마을에선 해군기지 건설 반대단체 회원들이 레미콘 차량 진입 저지를 시도하는 등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한국 수출입 물동량의 90% 이상이 통과하는 남방 해상교통로와 독도, 이어도를 지키기 위해 추진됐지만 현 정부 들어 미군의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는 좌파진영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대선 국면에서도 해군기지 건설사업은 ‘빅 이슈’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야권 후보가 사업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걸면 제주해군기지는 보수-진보 간 이념 대립의 상징적 사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마저 겉돌면 반대 명분이 커질 수밖에 없다.

국방부도 예산삭감으로 인한 공사 차질보다 이런 이념 대립에 따른 사업 표류를 더 우려하고 있다. 군 고위관계자는 “국회에서마저 대폭 예산을 삭감하는 사업을 왜 추진하느냐고 여론몰이에 나설 경우 기지 건설을 둘러싼 국론 분열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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