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시대]후계 정통성 논란 잠재우기… ‘극장국가’ 北의 3시간 세습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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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영결식 이모저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은 상징과 의례를 통해 정통성과 권위를 재생산하는 ‘극장국가’인 북한에서 현대판 왕조의 3대 세습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압축적으로 보여준 3시간짜리 웅대한 연극 한 편이었다.

후계자 김정은이 ‘실세 7명’과 함께 영구차를 호위하고 나타난 첫 장면 자체가 하나의 연출이었다. 김정은은 이날 군대를 사열하고 각 군 대표의 경례를 받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사령관이 됐다. 최고인민회의 의결, 노동당 대표자회 승인과 같은 절차는 불필요했다.

김 위원장의 영결식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영결식 전례에 따라 28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오전 내내 북한 매체들은 침묵했다. 낮 12시 43분 조선중앙통신이 “전국에 눈이 내려 군과 인민들이 눈을 치우느라 인산인해”라고 전한 것이 전부였다. 일종의 ‘궁금증 끌어올리기’였다. 조선중앙TV는 영결식이 끝난 뒤 “평양에 1933년 이래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고 보도했으나 구체적인 적설량은 밝히지 않았다. 우리 기상청은 “27일 오후 9시부터 평양지역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 28일 오후 3시 이후에 그쳤다”며 “총 적설량은 1∼5cm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영결식 방송은 오후 1시 57분경 이춘희 아나운서(68·여)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지금부터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와 영결하는 의식을 실황 중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알리면서 시작됐다.

중계는 김 위원장 영정, ‘김정은’ 이름이 적힌 대형 조화에 이어 김 위원장 운구차가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시작됐다. 생전에 벤츠 애호가였던 김 위원장이지만 영구차는 김 주석 영결식 때 썼던 링컨콘티넨털 그대로였다.

경호원이 차량을 호위하듯 김정은이 조수석 쪽 맨 앞에 섰고 그 뒤를 장성택, 김기남, 최태복이 따랐다. 운전석 쪽에는 군복 차림의 이영호, 김영춘, 김정각 등이 섰다. 정부 당국자는 “아버지의 영구차를 호위하며 김정은이 등장한 것 자체가 후계자로서의 파격”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부터 김 주석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권력승계를 준비해 온 김 위원장에게는 그런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최고사령관 동지를 추모하기 위해 엄숙히 정렬하였습니다.” 육해공-노농적위대 위병대대장이 사열보고를 하자 김정은이 거수경례로 받았다. 맞은편의 이영호 등 군인들도 같이 경례를 받았다. ‘군 최고사령관 김정은’의 위상이 주민들 앞에서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연주되는 가운데 운구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강변을 따라 평양 시내를 돈 행렬은 김 주석 영결식 때와 달리 김일성광장에 멈추지 않고 곧바로 금수산기념궁전을 향했다.

조선중앙TV는 “장군님을 수수한 야전복 차림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오열을 터뜨린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평소 즐겨 입던 야전복, 즉 점퍼를 수의(壽衣)로 입었다는 뜻으로 인민을 위해 현장을 자주 찾았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다시 들어선 행렬은 출발 때와 같았다. 김정은과 7인이 다시 운구차를 호위하고 들어섰다. 이들은 운구차량을 뒤따르던 검은 승용차들에 나눠 타고 평양 시내를 함께 돈 것으로 추정된다.

단상에서 기다리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 총리가 예의를 표했다. 최 총리 옆에는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서 있었다.

이복형 김정남, 친형 김정철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도, 김 위원장의 이복형제인 김평일 주폴란드 대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곁가지들이 청소’됐음을 알리며 ‘장자 승계’ 같은 정통성 논란의 싹도 사전에 제거한 것이다.

영결식이 끝나면서 시신은 방부 처리돼 아버지 김 주석과 함께 금수산기념궁전에 영구 보존된다. 애도기간 마지막 날인 29일 평양시내에서 대규모 추도행사가 한 차례 더 열린다.

이날 중국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의 북한 당국이 운영하는 류경호텔에서도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김 위원장 추모행사가 열렸다. 오전 일찍부터 꽃다발을 들고 들어가는 북한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조화도 잇따라 들어갔다. 현관에는 김 위원장 사망 발표 이후 붙여진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그대로 있었다.

한편 정부의 불허 방침을 어기고 무단 입북한 황혜로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 공동대표가 27일 김 위원장 영전에 조의를 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8일 보도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옌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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