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공식은 ‘대화무드 → 도발 → 협상때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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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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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차례 교전 모두 대화 분위기서 발생 왜?

《북한이 최근 미국, 한국과의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는 상황에서 서해 무력도발을 한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미국과 북한은 지난달 뉴욕 실무접촉을 통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북에 합의했다. 남북 관계도 지난달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는가 하면 인도적 대북 지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참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에도 지금과 비슷한 ‘대화국면’에서 1차(1999년 6월 15일), 2차(2002년 6월 29일) 연평해전을 일으킨 일을 상기하면 북한의 이번 해상 도발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1차 교전 직후 ‘평화보장체계’ 요구해 성과
이번에도 협상력 강화-내부 결속 노린 듯


○ 대화국면 조성한 뒤 도발


1999년 1차 연평해전이 터지기 직전 북한과 미국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을 둘러싸고 활발한 접촉을 벌이고 있었다. 그해 5월 18∼24일 미국 대표단이 처음으로 금창리 지하 시설을 방문했고 25∼28일에는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방북했다. 남북한 당국도 그해 5월 12일부터 6월 3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비밀 접촉을 갖고 고위급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남북 차관급 회담이 6월 22일 성사됐다.

2차 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인 2002년 4월 30일에도 북-미는 양자 대화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7월 10일 방북하기로 예정된 상태였다.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역은 그해 4월 초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2001년 이후 소강상태에 빠졌던 남북관계를 복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제4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정부의 대북 비료 20만 t 지원도 이뤄졌다.

○ 도발 후 대외 협상 전술로 활용

북한은 무력도발에 따른 긴장 분위기를 이후 대미, 대남 협상에 활용했다. 한반도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전 상태이고 서해가 군사적 분쟁지역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상대방에 협상 의제로 삼을 것을 압박하는 전술이었다.

북한은 1차 연평해전 직후인 1999년 6월 26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를 통해 “미국과 남측이 정전협정 이행을 포기했다”며 “북-미 간 ‘평화보장체계’가 수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년 뒤인 2000년 10월 북-미는 “한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꿔…”라는 내용의 공동 코뮈니케에 합의했다.

2차 연평해전이 발발한 뒤에도 북한은 더욱 강한 대미 압박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북한은 연평해전으로 방북을 연기했다가 10월 3일 방북한 켈리 차관보에게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며 미국을 압박하려 했고 그 결과 제2차 북핵 위기를 낳았다. 다만 북한은 임기 말의 김대중 정부와는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며 남북 간 교류 협력을 확대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북한은 이번에도 미국, 한국과의 대화에서 협상력을 키우는 동시에 ‘대화 국면’에 대한 내부의 이해와 단결을 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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