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러브콜 10년간 뿌리치다 ‘깜짝 수용’

  • 입력 2009년 9월 4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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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업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1시에 시작된 경제학 수업에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학생들은 이날 강의실에 몰려든 취재진에게 “(총리) 안 하면 안 되냐”고 묻는 등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 전 총장은 강의실에 들어갈 때는 비교적 말을 아꼈으나 강의 중에는 총리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훈구 기자
마지막 수업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1시에 시작된 경제학 수업에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학생들은 이날 강의실에 몰려든 취재진에게 “(총리) 안 하면 안 되냐”고 묻는 등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 전 총장은 강의실에 들어갈 때는 비교적 말을 아꼈으나 강의 중에는 총리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훈구 기자
■ 鄭 총리 내정자는 누구
대선때 범여권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형적인 엘리트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을 매우 어렵게 보냈다. 정 내정자는 사석에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평일에 밥을 먹은 적이 없다. 거의 매일 죽과 수제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옥수수가루 등으로 끼니를 해결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충남 공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원 침대시트 세탁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입주과외를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미국 유학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그에게 비행기 삯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군대는 가지 않았다. 딸밖에 없는 삼촌에게 양자로 입적됐지만 삼촌마저 세상을 떠나 ‘부선망(父先亡)’ 조항에 따라 소집연기 처분을 받았다. 197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이 징집이 면제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은사인 조순 당시 교수(전 부총리, 전 서울시장)의 추천으로 한국은행에 들어갔고 1년 뒤엔 다시 조 교수의 주선으로 유학을 떠났다.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안착한 그는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 저술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쌓았다. 1986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서명을 주도해 해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한국은행 총재직을 맡아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을 고사한 뒤 경제 부처의 수장이나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하마평에 올랐다. 당시 그는 “정년까지 학교에 남고 싶다”며 응하지 않았다.

2002년 교수 직선을 통해 서울대 총장에 오르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에 반대해 노무현 정부와 각을 세웠다. 이후에도 정치권의 러브콜은 계속됐다. 지방선거를 앞둔 2006년 여야가 모두 영입하려 했지만 “총장 임기를 마치고 싶다”며 뿌리쳤다.

그러나 총장직에서 물러난 2006년 말부터 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범여권의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2007년 초에는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정치행보에 나서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고 결국 “정치세력화를 추진할 능력이 부족하다”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어린 시절 야구선수를 꿈꿨고, 서울대 총장 시절에도 퇴임 후 거취를 물으면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꿈”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소문난 야구 마니아인 그는 두산 베어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지금도 1년에 20여 차례 야구장을 찾는다고 한다.

△1946년 충남 공주 △미국 컬럼비아대 조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총장 △한국경제학회장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동아일보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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