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서거정국… 한국정치 지각변동 오나

  • 입력 2009년 8월 18일 14시 10분


진보진영 구심점 공백… ‘DJ지지층+친노 세력’ 연대 모색할듯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현실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며 정권과 각을 세워왔던 정치 지도자이자 호남지역의 절대적 맹주였다. 그가 무대에서 퇴장한 뒤 누가, 어떤 식으로 그 공백을 메우느냐에 따라 한국 정치 지형의 모습이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DJ 서거 정국의 향방은

정치권 일각에선 DJ의 서거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와 같은 전 국민적 애도와 격렬한 정치적 흥분 상태를 불러오지나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DJ 서거 이후 그의 지지 세력이 느낄 큰 상실감에다 예기치 못한 정치적 변수가 맞물릴 경우 가뜩이나 휘발성 강한 한국 정치를 뒤흔들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DJ가 남긴 정치적 유산이 워낙 큰 데다 호남권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정치권에 미칠 파장은 상당히 클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DJ가 서거 직전까지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후퇴'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발해왔기 때문에 지지층의 동요와 상실감이 여권에 대한 비토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있다.

반면 노 전 대통령 서거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다. 노 전 대통령은 386세대를 중심으로 한 이념적 지지층을 갖고 있었고, 현 정권과의 대립, 퇴임 후 검찰 수사, 예기치 못한 자살 등 극적 요소들로 인해 정국에 충격을 줬다. DJ도 민주화 투사로서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긋긴 했지만 퇴임 이후엔 현실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뒀고 정치적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다"며 이념적 동질성을 강조했지만 노 전 대통령 지지층이 DJ 서거에 대해 비슷한 강도로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고령인 DJ의 타계는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기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죽음과는 달리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다만 DJ가 야당의 구심적 역할을 해 온 만큼 그의 공백이 궁극적으로는 민주당 지지층의 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포스트 DJ'와 민주당의 선택

민주당 진영에서는 DJ 후계자 지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내에선 필요에 의해서라도 '포스트 DJ 주자'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요구가 만만치 않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정체상태인 가장 큰 이유를 당의 뚜렷한 상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민주당 안팎의 판단이다.

포스트 DJ 주자는 호남권 맹주 자리와 직결돼 있다. 일각에선 박지원 의원을 비롯한 동교동계 인사들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향배가 갈릴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은 DJ의 심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의 유훈(遺訓)에 대해 정통성 있는 해석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동교동계가 쉽게 포스트 DJ 주자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 세력 자체가 워낙 약화돼 있는 데다 동교동계 출신들의 이해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에서는 "DJ 사후 동교동계가 누구를 선택하기 이전에 먼저 각개약진식의 세 결집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상황이 민주당에 탈(脫)호남 및 전국 정당화를 추진하라는 압력이 될 수도 있다. 지역색깔에서 자유롭고 DJ식 가치에서 상대적으로 한발 떨어져 있는 수도권 중진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핵심 현안마다 DJ가 개입해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절대 권위자가 사라진 이상 당내 입지가 취약하지만 수도권 민심을 읽을 수 있는 인사들이 활동할 공간이 그만큼 늘어나게 됐다.

●한나라당 '서진(西進) 정책' 탄력 받나

DJ의 작고에 따라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변한 호남권은 한나라당에도 새로운 승부처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미 호남권이 한나라당의 만년 열세지역에서 새로운 약진을 시도할 만한 틈새시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표 시절 DJ와 호남권에 공을 들였고, 18대 총선 이후 한나라당 지도부가 끊임없이 호남권에 구애(求愛)를 시도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색채에서도 한나라당은 친(親)서민, 중도 노선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DJ 사망 이후 민주당 지지층 결집이 가속화하면 한나라당으로선 중도 강화를 통해 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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