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 사건? 의도적 납치? 對美협상 ‘새 카드’ 얻은 北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20일 03시 00분


미국 커런트TV가 2006년 4월에 방영한 ‘탈북자’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화면 캡처. 이 다큐는 17일 북-중 국경 취재 도중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알려진 로라 링 씨가 제작했다. 사진 출처 커런트TV 홈페이지
미국 커런트TV가 2006년 4월에 방영한 ‘탈북자’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화면 캡처. 이 다큐는 17일 북-중 국경 취재 도중 북한에 억류된 것으로 알려진 로라 링 씨가 제작했다. 사진 출처 커런트TV 홈페이지
■ 北-美관계 돌출변수로
키 리졸브 연습으로 北경비대 긴장상태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오인 가능성도
오바마 행정부 첫 외교적 시험대에 올라
사건처리 결과 따라 北-美관계 중대기로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를 앞두고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여기자 2명의 억류라는 새로운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일단 미사일 발사 준비 등으로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미국을 상대로 활용할 ‘카드’를 하나 얻은 셈이다. 북한으로서는 협상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겠지만 진척 상황에 따라 북-미 간 직접대화를 진전시키는 호재가 될 수도, 대결 국면으로 치닫는 악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하튼 이번 사태는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첫 외교적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납치냐 억류냐

탈북자를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가는 언론인들은 대개 지린(吉林) 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를 찾는다. 이곳은 북한과 언어가 같다는 장점 때문에 탈북자가 많이 은신해 있고 이들을 쉽게 인터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기자들도 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延吉)에서 탈북자들을 취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17일 아침에 투먼(圖們)의 두만강 변에 나갔다가 소식이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두만강 기슭에 거주하는 한 중국동포는 19일 통화에서 “현재 두만강은 녹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북한까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많다”면서 “14일에도 무거운 물건들을 얼음 위로 밀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투먼 앞 두만강 폭은 40∼50m이고 얼음 위에 눈이 덮여 있기 때문에 땅과 강을 혼동하기 쉽다고 전했다.

현지 사정에 어두운 여기자들이 더 좋은 화면을 얻기 위해 욕심을 내다가 저도 모르게 북한 쪽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더구나 이들은 동양계 여성이어서 북한 군인들이 초기에는 이들을 한국인 또는 중국인으로 생각하고 억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먼의 맞은편은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 노동자구이다. 이곳의 북한 경비대는 최근 극도로 긴장돼 있는 상황이다. 한미 연합군사연습인 ‘키 리졸브’로 긴장이 조성돼 있는 데다 이달 4일 인근 경비대대에서 한 병사가 구타를 못 이긴 나머지 중대장과 소대장 등 상관 3명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바짝 긴장한 채 근무를 서고 있던 북한 군인들이 이른 아침 TV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여성들을 주시하다가 강을 건너오자 즉시 체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미국 여기자들을 납치했을 수도 있다. 옌볜은 북한 보위부의 정보망이 거미줄처럼 뻗쳐 있는 곳이다. 북한이 탈북자 취재를 시도하는 미국 여기자들에 대한 첩보를 얻은 뒤 이들을 두만강으로 유인해 납치했을 수 있다. 또는 한국인 관광객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은 북한군이 강을 건너와 여기자들을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 사건이 우발적인 것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 어떤 처우를 받을까

북한 국경경비대가 두만강 또는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인들을 억류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일단 억류된 중국인들은 고문 등 가혹행위는 받지 않지만 북한 수감자들이 있는 교도소의 독방에 수감돼 북한 수감자들과 똑같은 식사를 제공받으며 조사를 받는다. 다만 북한 수감자들처럼 온종일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있지는 않는다.

강을 건너온 목적이 실수였는지 의도적이었는지 가려내는 데 보통 일주일가량 걸리며 큰 문제가 없으면 이후 돌려보낸다. 중국인(중국동포 포함)이 북한 주민을 탈북시킬 목적으로 북한에 잠입했다 체포돼 석 달 이상씩 북한 교도소에서 고초를 겪는 경우도 있다. 이번 여기자들은 피랍 이후 신분을 밝혔을 것으로 보이지만 소유하고 있던 TV 카메라 등에 탈북자 인터뷰 등 북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경우 ‘적대 행위’로 간주되어 곤란한 상황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풀려나도 어디에다 하소연하기 힘든 중국인과는 달리 이들은 신분이 기자이고 피랍 사실 자체가 전 세계에 보도된 상황이니만큼 ‘정중한’ 대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언제 풀려날까

억류된 여기자들은 민간인이기 때문에 석방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우발적 월경으로 처리해 며칠 안에 장비만 빼앗고 이들을 추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굴러들어온 복’을 그냥 차버릴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수순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얻어낼 것을 얻어낸 뒤 여기자를 풀어주는 ‘선의(善意)’를 보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인 억류가 북-미 간 대화로 이어지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으로서도 민간인 억류의 장기화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특히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여기자들을 끌고 갔기 때문에 중국과의 마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어서 이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이번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오바마 행정부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문제를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가늠자가 된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번 사안의 해결 과정이 미칠 파장은 중요해 보인다.

도문=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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