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4强외교 ‘틀’을 깨라

  • 입력 2008년 9월 30일 19시 51분


이명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을 러시아와 세계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마침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이 대통령보다 사흘 먼저 러시아를 찾았다. 두 정상에 대한 관심을 비교해보면 한국 대통령의 정상외교 위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지난달 25, 26일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차베스는 먼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이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만났다. 푸틴은 관저에서, 메드베데프는 이례적으로 지방도시 오렌부르크에서 차베스를 환대했다.

요지부동인 미-일-중-러 순서

차베스에게는 외국 통신사들도 큰 관심을 보여 이틀 동안 16건의 관련기사를 세계에 타전했다. AP AFP DPA UPI가 빠짐없이 기사를 내보냈다. 반면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시작된 지난달 28일부터 30일까지 송고된 외국 통신 기사는 7건에 그쳤다. 그마나 AFP가 6건을 보냈고 다른 통신사의 관심은 “한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재가동 움직임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을 전한 AP의 단신(短信)이 전부다.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은 이 대통령 러시아 방문의 뉴스 가치를 차베스의 방문보다 낮게 평가한 것이다.

실세 총리 푸틴은 차베스에게는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 증진이 러시아 외교의 최우선 순위”라고 덕담을 했으나 이 대통령에게는 면담 시작을 갑자기 50분이나 늦추는 외교적 결례를 저질렀다.

러시아 방문이 많은 성과를 거뒀는데 공연히 ‘옥에 티’를 강조해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순서로 굳어진 한국 대통령의 취임 후 첫 4강외교 방식이 초래한 부작용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전임자들처럼 틀에 박힌 순서에 따라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찾았다. 러시아 측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러시아의 상대적 냉대는 5월 이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첫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 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유물”이라며 시비를 건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한-러 관계가 수교 이후 최악이라고 할 정도로 악화된 시기에 러시아를 찾았다.

이 대통령이 기계적 스케줄에 맞춰 4강외교 1라운드를 진행하다 보니 반 바퀴를 다시 돌아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국에선 한 달 뒤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고 일본에서도 지난주 총리가 바뀌었다.

이제는 4강외교의 틀을 깨야 한다. 러시아와는 수교 18년, 중국과는 수교 16년이 됐다. 두 나라를 언제까지 4강의 뒷자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할 것인가. 우리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미국에 달려가 마치 정통성을 인정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차한 외교를 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방법은 현안에 따라 정상외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한미동맹 복원이 가장 시급한 외교 현안이면 미국을 먼저 방문하고, 에너지 협력이 국익을 위한 최대 현안이라면 러시아를 먼저 방문하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과의 협의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면 중국을 먼저 찾아야 한다.

현안 따라 정상외교 차례 정해야

4강 정상들과 서둘러 수인사를 한다고 친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과제를 함께 해결한 실적이 쌓여야만 친분이 깊어진다. 이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3차례 만났지만 두 사람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정상외교로 좁혀진 양국 사이보다 멜라민 파동과 중국 선원의 우리 해경 살해로 벌어진 간격이 훨씬 큰 것이 현실이다.

한사코 4강외교를 앞세울 이유도 없다. 4강을 강조하면 나머지 국가는 모두 ‘비(非)4강’이 된다. 4강에만 매달리는 한국을 비4강으로 분류된 나라가 존중할 까닭이 없다. 경제적으로도 손해다. 한국은 지난주 인도와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을 사실상 매듭지었다.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세계 최대시장인 EU와 11억 인구를 가진 인도시장을 경쟁국에 앞서 선점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 실용외교와 경제 살리기가 정부의 정책이라면 4강을 제쳐두고 EU와 인도에 먼저 달려가는 ‘파격(破格)’도 나와야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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