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南사과 요구 ‘北 책임전가 전술’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3월 31일 02시 57분


■ “당국간 대화 중단 가능성” 北 전통문 분석

과거와 달리 軍이 공식적으로 전통문 보내

“김정일, 軍에 남북관계 개입 위임” 해석도

물밑접촉 창구 없어 내달 6·15공동위 주목


토요일인 29일 오후 갑작스럽게 날아든 북한 군부의 전화통지문은 주체와 내용 사이에 논리적 불일치가 감지됐다.

국방을 담당하는 북측의 군과 남측의 군이 주고받는 메시지에 ‘모든 남북 대화와 접촉 중단’이나 ‘남측 당국자들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전면 차단’ 등 전반적인 남북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경고가 담겨 있었던 것.

이를 정밀 분석한 정부 안팎의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이 몇 가지 ‘장치’를 통해 ‘남북 당국 간 회담 중단 가능성’이라는 메시지를 공식 전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27일 개성의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한국 당국자 11명을 쫓아낸 북한이 당국 간 관계 전면 중단을 공식 선언하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는 평가다.

▽북한 전화통지문에 담긴 속뜻은?=군부가 남북 관계 전반에 대해 중대한 언급을 할 수 있는 논리적 고리는 “위임에 의하여”란 두 단어였다. 정부 당국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임을 받아 군이 남북 관계 전반에 대해 언급한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이 향후 남북 관계에 대해 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권한까지 위임했다고 해석하는 적극적인 견해도 있다. 1995년부터 ‘선군(先軍) 정치’를 국가 전략으로 삼아 온 북한이 미국 및 남한 등 주변 정세의 급변이라는 국가 비상상황을 맞아 군부가 대외관계의 모든 것에 관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게 논리적인 근거다.

통지문은 미래에 자신들이 내릴 결정을 예고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북한 협상 전술의 하나다. ‘김태영 합참의장의 사과’라는 불가능한 조건을 내세운 뒤 ‘모든 남북 대화 및 접촉 중단과 군사분계선을 통한 남한 당국자 통행 중단’이라는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남한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바다를 넘어 잿더미로=북한은 이어 30일 ‘불바다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잿더미로 될 것’이라는 발언을 통해 전날 주장을 보강하는 계획성을 보였다. 이 발언은 1994년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협상을 위해 판문점에 왔던 북측 박영수 단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에서 한발 더 나간 것.

북한은 “우리 (북한) 군대는 호전광들이 선제타격을 가해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있지 않을 것”이라며 “불질에는 불벼락으로,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맞받아 나가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방식이며 고유한 전투적 기질”이라며 극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거 남북 당국 관계 단절과의 차이는?=북한이 모든 남북 당국 간 대화와 접촉의 중단이라는 수순을 밟을 경우 민간과의 관계는 유지하면서 남한 정부와의 분열 기도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태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일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은 2004년 7월 탈북자 468명이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입국한 것을 이유로 다음 해 5월까지 10개월 동안 당국 간 회담을 전면 중단하고 민간과의 관계만 유지했다.

다른 정부 당국자는 “과거에는 당이나 내각 관계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당분간 당국 간 대화는 어렵겠다’고 통보하는 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군이 전화통지문이라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관계 단절을 시사한 것이어서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당국 관계 단절의 공식화 및 전망=북한은 최근 사실상 남한 당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상태였다. 공식 회담은 지난달 13일 끝난 남북도로협력분과위원회 1차 회담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당국 간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것과 북한이 당국 간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며 “2004년의 경우 남북 사이에 ‘진정성을 가진 대화의 틀’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물밑 접촉 창구조차 없는 상태인 것이 차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당국 간 관계 단절에서 나아가 민간 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관계까지 단절하는 초강수를 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음 달 3일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인 6·15공동위원회의 정상적인 개최 여부는 그런 이유로 관심을 끌고 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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