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저에게 지연 학연 혈연은 없습니다”

  • 입력 2008년 1월 21일 2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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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주 주요 정당 원내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저에게 학연 지연 혈연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동안 이 당선인이 많은 말을 했지만 나는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가 어느 한 정파나 세력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연(緣)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흔히 이념에 따라 보수니 진보니, 좌(左)니 우(右)니 하고 나누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연이다. 사회든 정치든 이미 지연 혈연 학연 등으로 깊이 갈라져 있고, 이념은 그 같은 편 가르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차용(借用)돼 왔을 뿐이다. 연을 통한 집단이익 추구를 이념으로 포장했다고나 할까. 가장 도덕적인 체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런 현상이 유독 심했던 것은 지도자의 한계인지, 현실정치의 제약인지 혼란스럽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연에 의한 귀속주의의 폐해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지연(地緣)이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 40년간 한국정치가 3김의 패거리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지연 때문이다. 실용(實用)이라 함은 이런 전근대적인 연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흔히 실용을 몰이념(沒理念) 몰가치(沒價値)로 보지만 엄밀히 말하면 몰연(沒緣)이다. 실용이 표방하는 근대성과 합리성의 본질은 연으로부터의 자유에 있다.

新PK KS, 우려되는 편중인사

연으로부터의 단절은 역시 인사(人事)에서 출발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어떤 정권이든 연에 의한 편중인사가 화근이었다. 정권에 따라 특정 인맥이 인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갈등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이것이 결국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정권의 몰락을 자초했다. 영문 알파벳 두 글자 속에 대한민국의 인사가 모두 담겨 있었으니 야만의 세월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세간에는 신PK, 신KS와 같은 말들이 나돈다고 하니 걱정이다.

연에서 벗어나려면 대통령 혼자 힘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현장(現場)에서도 이를 타파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대선 직후 나는 이영일(69) 한중문화협회 총재에게서 한 통의 e메일을 받았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그는 광주에서 전국구 포함 세 번 국회의원을 했다. 두 번은 전두환의 민정당에서, 마지막 한 번은 김대중(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서였다.

그는 e메일에서 “전남북을 통틀어 이명박 후보 지지도가 8%대에 머문 것은 이번 대선에서 확인된 국민 대다수의 주류의식을 호남인들만 공유하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이제는 호남인들도 주류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DJ가 주입시켰던 정치적 선동이 지역 패자(覇者)로서 자신의 영향력 유지에 있었을 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호남인들의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었음을 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에 거세게 반발할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감정 문제를 푸는 한 단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총선을 앞두고 호남에선 벌써 “뭉쳐야 산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뭉쳐야 한다니,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DJ의 부활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호남의 주류화(主流化)를 위해서인가?

연초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비율이 호남에서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넘었다. 광주 11.5%, 전남 15.6%, 전북 17.6%다.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치다. 4년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 득표율은 광주 0.1%, 전남 0.84%, 전북 0.14%였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처 위에 마침내 돋아나기 시작한 이런 싹들은 밟아버려야 할 것인가, 북돋워야 할 것인가? 그 답은 호남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호남 主流化의 싹을 짓밟아서야

앞서 이영일 씨는 또한 ‘호남의 주류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도 촉구했다. 지역 안배로 벼슬이나 몇 자리 나눠 주고 예산이나 보조해 주는 실패한 정책들을 반복하지 말고 호남인을 각성케 하는 데 적극 나서 달라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연으로부터의 자유로운 대통령’만이 내딛을 수 있다. 그만이 이긴 쪽의 오만을 누르고, 진 쪽의 상실감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모두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이다. 5년 후, 우리는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는 이 당선인의 그 말을 다시 듣고 싶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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