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이명박 후보의 수업료

  • 입력 2007년 10월 3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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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나라당은 이명박 대선 후보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미국 측이 이 후보의 위상을 인정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부 언론은 “미국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까지 해석했다. 2일 오후 이 후보는 면담 무산을 보고받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불과 닷새 사이에 이명박-부시 면담 추진을 놓고 표출된 엇갈린 표정들이다.

이 후보의 부시 대통령 면담 추진 과정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후보, 그것도 야당 후보이니 비공식라인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영우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위원이 한국인 출신인 데다 부시 대통령 측과 선이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를 채널로 삼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발표하기 전에는 성사 여부를 마지막까지 이중 삼중으로 확인했어야 한다. 한나라당은 이를 소홀히 했다.

외교의 세계에선 문서에 도장을 찍은 뒤에도 나중에 자구(字句) 하나를 놓고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이 후보의 부시 대통령 면담은 이런 외교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 고려까지 해야 하는 사안이다.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대선 정국에 말려드는 데 관심이 없다”고까지 했다. 물론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면담 성사 여부를 확인하고 나선 것이 미국으로선 큰 부담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더욱 한나라당은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의 반응도 헤아리는 섬세함을 보여야 했다.

가정이긴 하지만 비공식라인을 통해 성사를 확인했더라도 입단속을 시키고 정중히 양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는 절차를 밟았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미국 대통령이 외빈을 만나려면 반드시 국가안보회의(NSC)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쯤도 알고 대처했어야 옳다.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은 망신을 사기 십상이다.

이 후보가 부시 대통령을 만나려는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4강 외교’ ‘ 경제·자원 외교’ ‘한미 FTA 조기 비준 촉구’ 운운하지만 결국 국민에게 ‘미국 대통령이 인정하는 후보’라는 인상을 심어 줘 대세론을 굳히려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몰라도 너무 가볍고 진부하다. 밥이 다 되기도 전에 숟가락부터 들고 나서는 격이다. 국민은 지난 4년 7개월 동안 보고 겪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벼운 처신에 지쳐 있다. 그 반사이익을 한나라당과 이 후보가 누리고 있다. 그런데 후보 자신과 참모들이 대선 기간 중에 벌써부터 사려 깊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또 다른 노무현’의 가능성을 국민에게 각인시킬 참인가.

외교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은 겸허한 자세로 역량을 축적하면서 기회가 왔을 때 국익을 위해 어떤 외교를 펼칠지를 구상하고, 그것을 정책으로 심화시키기에 힘쓸 일이다.

이번 일로 이 후보는 경솔했다는 평가와 함께 경제는 몰라도 외교에는 약하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었다.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을 터이다. 당 일각에서는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처럼’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후보는 비싼 ‘수업료’를 냈다. 수업료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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